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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Nov 07. 2024

밀양 엄마 또 모셔오고, 영덕 엄마 아주 떠나보내고

90세 영덕 엄마가 93세 밀양 엄마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10월 30일 승용차로 밀양 엄마를 모시러 가야 했다. 8월, 9월, 10월, 석 달이 훌쩍 지나고 다시 노모 돌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창원 가는 길에 먼저 숙이와 함께 영덕 병원에 들렀다. 건강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는 장모님, 영덕 엄마를 대구 큰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3주 전에 왔을 때보다 영덕 엄마는 훨씬 더 기운 없고 말도 잘 못하는 상태였다. 대구에 사는 처형과 처제 그리고 동서도 병원에 왔다. 세 딸과 막내 사위가 영덕 엄마를 모시고 대구로 떠났둘째 사위 나는 그들과 헤어져 밀양 엄마에게로 향해야 했다. 처남댁을 차로 영덕 엄마집에 내려주고.



밀양 엄마 모셔오고 영덕 엄마 떠나보내고

  

창원 동생 집에 도착해 보니 엄마는 나를 기다리다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엄마를 깨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기운 없던 영덕 엄마를 보고 난 후라 그런지 밀양 엄마가 멀쩡하게 건강해 보였다. 엄마를 차에 태워 바로 밀양 엄마집으로 갔다. 내가 정미기로 쌀을 찧는 동안 엄마는 방과 거실과 부엌을 쓸고 닦았다. 마당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 버려야 할 것들을 밖으로 내놓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런 모습만 보면 엄마는 이전처럼 혼자 시골에 살아도 될 것 같다. 부엌 싱크대나 가스레인지를 앉은뱅이 식으로 개조하고 모든 편의시설을 설치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돌봐줄 자식이 없었다면 엄마는 아마도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엄마를 태우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에 쉬며 엄마가 석달 전까지 다녔던 서울의 주간보호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김원경 어르신 보호잔데요. 엄마가 내일 11월 1일부터 주간보호센터에 다시 가려고 합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정원이 다 차서 이번에는 어머니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낭패다. 이러면 새로운 데를 알아봐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라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주간보호센터에 가는 줄 알고 옷을 다 입고 기다렸다. 새 학교를 알아봐야 한다고 하니 섭섭한 눈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집에서 가까운 주간보호센터 두 곳에 전화했다. 한 곳은 정원이 다 찼다고 하고, 다른 한 곳은 우리 집까지는 차량운행을 안 한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에 교통 혼잡이 심해서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서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매일 내가 엄마를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수밖에.    

 

엄마를 휠체어로 모시고 주간보호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차를 타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였다. 상담 중에 숙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영덕 엄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단다. 이런! 이틀 전 대구의 큰 병원으로 옮길 때 상태가 나쁘긴 했지만, 이렇게 금방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밀양 엄마 돌봄 문제 보다 영덕 엄마의 장례식이 더 큰 문제가 됐다. 나와 우리 딸이 모두 장례식에 가려면 빈집에서 밀양 엄마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졌다. 부랴부랴 본가 다섯 형제자매의 카톡방에 이 소식을 올렸다. 부천 작은누나에겐 직접 전화해서 엄마 돌봄을 부탁했다. 누나는 주말에 일이 잡혀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대타를 구해서 맡기고 오겠다고 했다. 누나가 올때까지 딸이 할머니 곁에 남아있다가 혼자 늦게 장례식장으로 오기로 했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3일장을 마친 일요일 저녁 숙이는 처형처제와 영덕 엄마집으로 유품정리하러 가고 나는 딸 아들과 함께 밤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지만 죽음엔 순서가 없다고 했던가. 90세 영덕 엄마가 그렇게 우리 곁을 아주 떠나셨다. 93세 밀양 엄마보다 먼저 가셨다. 이제 양가 부모는 밀양 엄마뿐이다. 엄마가 큰아들네와 작은아들네 먼길을 오가며 3개월씩 돌봄 받고 사는 게 3년째. 이렇게라도 엄마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음 날 작은누나와 점심을 같이 하며 2박 3일간 엄마를 돌본 수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내 엄마이기도 하지만 누나 엄마이기도 한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누나는 어색하다고 했다. 내 고마운 마음도 맞고 어색하다는 누나의 마음도 맞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창원에 사는 남동생과 내가 3개월씩 엄마를 돌보고 누나 둘과 여동생은 이런 식으로 보조적인 돌봄을 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무래도 남동생과 내가 받은 혜택이 많으니 자연스러운 걸까? 며느리인 숙이나 제수씨에게 엄마가 큰 짐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 학교 가자.”

“벌써?”

“새 학교는 조금 멀어. 출퇴근 시간에 교통이 복잡해서 여기까지 차가 올 수가 없어. 우리가 가야 하니까 조금 더 일찍 나서야지.”

“그러면 네 차 타고 학교 가는 거야?”

“아니 휠체어 타고 갈 거야. 많이 멀지도 않은데 길에 차가 많아서 차라리 걸어가는 나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경사가 좀 급한 내리막 골목길을 가는데, 돌아올 때는 오르막길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화동 로터리, 혜화문, 한성대입구역을 지나서 주간보호센터에 도착하니 8시 20분이었다. 20분이 걸린 셈이다. 이제 3개월 동안 매일 아침과 저녁 왕복 40분씩 휠체어와 함께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건강을 위해 매일 만 보를 걷고 있는데, 이제 일부러 걷지 않아도 되니 잘 된 걸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대구 큰누나와 부천의 작은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매일 그렇게 휠체어로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게 힘들지 않겠냐고. 그렇겠지만 아주 힘든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줬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엄마는 평생을 매일 아침 눈 뜨면 시골길을 걸어 논밭으로 나가 일하다가 해가 질 때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매일 아침저녁 혜화동 사거리와 혜화문과 한성대입구역, 번잡한 서울 거리를 휠체어를 타고 지나다닌다. / 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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