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
-백수린,《눈부신 안부》, 문학동네, 2023, 225-226쪽
사랑하는 엄마!
소설 《눈부신 안부》를 읽고 이프에서 토론했어. 이프는 엄마 딸이 8년째 진행하는 페미니즘 토론 모임이란 거 알지? 이달엔 책을 추천한 원석이 진행을 맡아줘서 내가 수다를 많이 즐겼어. 책에 죽음 이야기가 나와서 엄마 생각을 많이 했어. 파독 간호사로 갔다가 의사가 된 이모가 질녀 해미에게 들려준 에피소드 중, 중년의 독일 여자 소피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에 따라 죽은 이야기가 있었어.
매일 같은 시간에 마당에서 닭에게 사료를 주던 소피아의 모습이 며칠째 안 보였겠지? 이웃이 궁금해서 집안에 들어갔고 목을 맨 소피아를 발견했어. 50대 여자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생의 슬픔이 와락 와닿았어.
아버지가 죽은 것 말곤 그 집 풍경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보였어. 마당엔 장작이 쌓여 있고 찬장마다 피클이며 잼이 가득 쟁여져 있었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소피아는 그 겨울을 살았을 테지, 장작이 없어질 때까지. 나뭇가지마다 다시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들을 따다 만든 잼을 또 다 먹을 때까지. 그러나 여자는 갑자기 죽고 말았어. 갑자기 닥친 아버지의 죽음, 그 후에 갑자기.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
이 말이 엄마에겐 어떻게 들려? 엄마도 갑자기 죽은 거 같지? 왜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결코 쉽게 익숙해질 수 없는 낯선 사건이니까. 소피아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그랬던 거 같아. 오래 아픈 후의 죽음조차 '갑자기'였어. 준비되지 못한,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인 게지. 소피아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어.
사랑해 엄마!
엄마 갑자기 떠나고 벌서 28일이 가고 있어. 여전히 엄마가 보고 싶은 하루였어.
아직도 시골집에 가면 엄마가 있을 것 같고 전화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엄마 없는 이 첫달, 겨울 첫눈이 117년 만의 최대 폭설이라네. 뭐랄까, 이 소식을 궁금해할 엄마가 없고 내가 걱정할 노인이 없다는 사실을 또 확인하고 말았어. 어제 하루 종일 우리 동네엔 눈폭탄이 쏟아지고 밤에도 더 내렸지만, 이 소식을 전할 엄마가 없어. 고향에 눈이 얼마나 왔을지 나는 궁금하지가 않으니, 참 이상하지? 엄마가 없으니까.
대신 《눈부신 안부》 속 이모의 말처럼 엄마가 '갑자기' 죽었구나, 실감하고 있어. 엄마가 오래 아프기도 했고 올 들어 나는 계속 다가오는 이별을 예감했더랬지. 갑자기 훅 그날이 와 버릴까 봐 두려웠지. 시간을 내서 엄마한테 훌쩍 다녀오고 그랬잖아. 엄마한테 전화도 점점 많이 하고 수다쟁이 모녀로 지냈고 말이야. 그럼에도 엄마, 90세 엄마의 죽음은 '갑자기'였다고 내 마음이 말하고 있어.
갑자기 엄마가 사라져 버렸어. 어디에도 없는 엄마, 이게 너무 낯설고 적응이 안 되는 거야 엄마. 정말 아주, 엄마는 사라져 버린 걸까, 스스로 묻곤 해. '갑자기' 엄마가 없고 만질 수 없게 된 걸 믿고 싶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글로 엄마와 함께 하는지도 몰라. 부재가 싫어서 엄마 옷을 입고 엄마의 손수건을 쓰나 봐.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래 엄마, 가까운 사이, 애착하는 관계일수록,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인 걸 알겠어.10년 전 아빠 돌아가셨을 때랑 비교해 봐도 그래. 그땐 내 몸이 아팠고 일상이 피곤했고 수술하고 자연치유에 집중하느라 아빠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기 어려웠던 거 같아. 아빠는 85세로, 엄마는 90세로 갔지. 엄마가 더 갑자기 같아.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 맞지 엄마? 나도 그렇게 가겠지? 그래서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라는 것, 맞지? 그래, 엄마가 내게 해주고 싶은 말도 바로 그거지? 한 번 뿐이라서 아깝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 그 삶을 찬란하고 눈부시게 살라고, 엄마의 죽음이 하는 말이고 《눈부신 안부》가 하는 말이었어.
어떻게 사는 게 찬란하게 사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눈부신 삶일까? 책 말미에선 이렇게 말하지.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303-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