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비행을 끝내고 죽은 수캐미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다. 몸통 따로 날개 따로 떨어져 있다. 몸의 꿈과 날개의 꿈을 달리 품고 저승으로 간 것일까?
결혼한 여왕개미는 제일 먼저 제 몸에서 두 날개를 떼어낸다. 정착해 일가(一家)를 이루려면 더 이상 높이 더 높이 비상을 꿈꾸어서는 안 되는 법(法)일까?
일생(一生)을, 양식을 모으는 육아에 힘쓰는 집을 지키는 궂은일을 도맡는 일개미는, 날개가 없다. 날개는 생업(生業)을 방해해서? 날개는 외계(外界)와 간통해서?
사랑하는 엄마!
엄마 떠난 지 32일째 하루가 저물었어. 참 야속한 세월이다 그쟈?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이 세월은 고장도 없네~~" 딱 그 유행가 가사 그대로 세월이 가네 엄마. 언젠가는 엄마를 잊어버린 것처럼, 엄마 없는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올까?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데 울 엄마만 없는 세상이 정상이야?
정상 아닌 세상이 어디 요즘만이었겠어 엄마. 시를 읽었어. 날개에 대한 단상, 엄마 이야기이자 이 땅의 여성들의 삶으로 읽혀서 잠시 울컥하고 화가 나려 했어. 참 재주 많고 총기 있고 열정 있는 울 엄마. 그러나 일찍이 한 번도 날개를 펴 본 적도 없는 엄마. 아니 너무 일찍이 날개를 떼고 주저앉혀진 엄마. 아내요 며느리요 엄마로, 줄줄이 자식 낳고 남편과 어른들 뒷바라지로, 날개를 잊어야 살 수 있었던 엄마.
비상을 꿈꾸지 않도록 길러진 야속한 세월이었어. 수캐미도 일개미도 딱하긴 마찬가지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야속해. 날개와 삶을 바꿔야 했다니, 아, 엄마, 나도 날개를 떼는 법부터 배웠던 거 같지? 그러나 엄마 딸은 날개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지? 날개를 퍼덕이며 날기를 연습했어. 날아도 살 수 있었어 엄마.
엄마에게서 날개를 떼고 주저앉힌 야속한 세월이 정말 미워. 매일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랑 함께 다닐수록 한 인간으로서 김성교란 사람을 생각해. 그러다 보면 엄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선가 날고 있는 엄마를 그려 보게 돼. 엄만 여기엔 없는 게 맞는데 또 늘 어디에나 있어.
어제 이른 아침 딸이랑 서울에서 서촌을 걷고 인왕산 자락에도 올랐어. 모녀가 일요일마다 새벽에 나가서 서울 유랑으로 운동하잖아. 그 이른 일요일 아침 8시도 안 된 시각 서촌에 문을 연 신발 가게를 만났어. 노인이 신기 좋은 편한 신발들이 많이 보였어. 허름한 시골 풍의 신발가게에 나는 왜 울컥했을까? 엄마한테 사 주면 좋을 신발들 때문이었겠지. 걸음을 멈춰 주인과 인사도 하고 신발 구경을 했지.
돌아오는 길에 밀양 엄마를 위해 털 달린 방한화 한 켤레 샀어. 만져 보고 엎어 보고 신어 보았어. 신고 벗기 편한지 따뜻한지, 가벼운지, 바닥이 두꺼워 걷기 불편하진 않은지, 미끄럽지 않은지. 운동화처럼 신고 벗기 편해 보이는 것들은 의외로 뒤축이 쉽게 꺾이고 힘이 없었어. 발등 덮이고 지퍼가 난 건 그렇지 않더라.
지퍼 일일이 잠그지 않아도 잠깐 신는 덴 지장 없겠다 싶어서 그걸로 샀어. 새삼 실감했어. 아~ 우리 엄마는 세상에 없구나. 엄마 주겠다고 신을 사진 않았거든. 대신 시엄마만남았구나 느꼈어. 두 엄마 돌봄으로 몸이 몇 개 되면 좋겠다 생각될 때 있었건만, 울엄마는 이제 없고 시엄마만 계시구나.
시엄마는 오늘 새 털신을 신고 주간보호센터 다녀오셨어. 예쁘고 따뜻하게 신고 가시니 내 맘이 편하더라 엄마. 아, 엄마 신발 한 켤레 챙겨두지 않은 게 아쉬워. 엄마 발이 나보다 작아서 물려받아 신을 수가 없더라구. 시엄마를 보며, 시엄마 신발을 챙기며엄마를 생각했어. 엄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어.
사랑하는 엄마!
엄마가 쓰던 예쁜 지팡이도 내가 챙겨다 시엄마 드린 거 알아? 가볍고 높이 조절되고 예쁘고 참 좋은 지팡이잖아. 시엄마는 허리가 굽었음에도 밖에 나갈 땐 지팡이를 안 하시려 하더라구. 노인용 지팡이 드렸는데 별로 안 좋아하셨어. 근데 엄마 지팡이는 맘에 드시나 봐. 실내에서 왔다 갔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셔.
시골집안에서 이 예쁜 지팡이 짚고 다니던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해. 그토록 짱짱하던 엄마가 지팡이를 짚어야 했을 때, 참 세월이 야속하더라. 심장이 안 좋고 신장까지 안 좋으니 몸에 좋은 피가 팍팍 공급되기 어려웠지. 지팡이 없인 언제 갑자기 픽 쓰러질지 알 수 없는 엄마의 몸. 고위험군이란 사실을 알고 엄만 지팡이를 짚었지. 입원할 때도 지팡이는 따라갔고 마지막 대구까지 따라갔다가 유품으로 남았지.
몇 년 전에 내가 엄마한테 사준 스텐 보온병도 엄마집 유품 정리하고 내가 챙겨 와 쓰고 있어. 내가 평소 쓰던 거랑 교대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고 있지. 보온병으로 물 마실 때마다 엄마가 보여. 엄마 손이 닿고 엄마를 따뜻하게 했던 물건이 고마워. 그런데 어디에도 엄마는 없어.
사랑하는 엄마, 좋은 그 나라에선 지팡이 없이 날개로 날아다니겠지? 춥지 않고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게 날고 있을 거야. 엄마, 시엄마 돌아가시면 내가 나중에 엄마 지팡이 또 간직할래. 내가 이어서 쓰게 될까? 지금은 먼 얘기 같지만 그리 먼 것도 아냐 엄마. 60대에도 다리 불편하면 지팡이 짚는 사람들 있잖아. 엄마 딸이 엄마가 쓰던 지팡이를 쓸 때면 엄마 곁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