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서 흔들임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정신을 배웠습니다.
"정말 추운 아침에 딸 걸어서 출근할 때 엄마가 같이 가 볼래. 딸 바래주고 엄마는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거지. 두 시간이면 되겠지? 이른 아침 엄마 글 한 편 쓰고, 아침 운동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렇게 별러 오던 이벤트였다. 이름하여 딸과 엄마 겨울 아침 걸어서 출근하기. 우리는 걷기 좋아하는 최강 모녀니까. 기왕 하는 거 오늘처럼 가장 추운 아침에 해 보기로 했다.
2021년 1월 8일 오전 7시 53분. 2050 딸과 엄마가 집에서 나온 지 10분 정도 경과했다. 안산문화원 앞 눈 쌓인 오르막길을 딸이 씩씩하게 걸어 올라가고 있다. 엄마는 뒤따라가며 사진을 찍었다. 영화 18도, 두꺼운 스키 장갑 안에 털장갑 하나 더 벗어야 카메라를 조작할 수 있다. 아직 길에 차도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 고요가 느껴진다.
오르막이 지나면 내리막이 온다. 사동 복지센터를 지나고 감골 시민홀이 저만치 모습을 드러낼 즈음, 노랗게 아침 해가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러냈다. 8시 02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를 향해 걸으며 수다 떠는 딸과 엄마. 서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모자와 두꺼운 긴 패딩에 목도리와 장갑으로 온몸을 감싼 덕에 20분 정도 걸은 현재 우리 몸은 훈훈했다. 오~~ 영하 18도 별거 아닌걸? 너무 시시한 거 아냐? 뽀드득 뽀드득 눈길을 쉼 없이 걸었다.
45분 만에 딸은 직장에 도착했고 나는 돌아서서 해안로를 따라 걸었다. 8시 55분. 집에서 나온 후 한 시간 15분이 지나고 있었다. 사리역 둑길로 들어서니 아침 햇살이 점점 길게 비쳐왔다. 양말 두 겹에 등산화를 신었지만 발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장갑을 벗으면 손이 끊어질 듯 시렸다. 그래도 이 역사적인 아침을 기록해야 했다. 김이 서려 안경은 벗어버렸다. 모자 끝엔 고드름이 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등반가 사진처럼.
9시 35분. 집에 와 계단을 4층까지 오르는 동안 모자에서 물이 자꾸 떨어졌다. 사진을 찍어 보니 고드름이 녹아 물방울이 되고 있었다. 중간에 두 번 마스크 속을 닦으며 왔건만 마스크에서도 목도리와 패딩에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갈 때 영하 18도, 두 시간 지난 지금 -17도였다. 얼었던 발과 손이 집에 오니 끊어질 듯 아팠다. 온몸을 녹이느라, 욕실 청소에 알몸 스트레칭을 하면서 더운물 아래 30분 움직이며 놀았다.
오늘의 경제 기사 읽기는 종이 신문으로 오늘 온 '여성신문' 신년호로 정했다. 신년호 1면 기사는 '2021년 제18회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 지도자상'(미지상) 이야기였다. 큰 제목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아래, 수상자 7명의 이름과 사진이 나와 있었다.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인 여성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기사 공부 충분하겠다. 그중에 경제 관련 인물이 누가 있나, 그 한 사람에게 집중해 보는 것으로 하겠다.
나온 김에 미지상 수상자 7명을 구경이나 하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
김영서 작가, 김은희 테니스 코치, 배진경 한국 여성노동자회 대표, 안젤라 킬로렌 CJE&M America CEO, 은선심 전력노조 한일병원 위원장, 이진희 관세청 관세평가분류원장, 그리고 이영 양육비 해결 총연합회 대표.
내 눈을 사로잡은 인물은 안젤라 킬로렌. 수상자 7명을 소개하는 1면 기사에서 그의 단락을 옮겨 보겠다.
안젤라 킬로렌 CJE&M America CEO는 한국 문화의 매력을 널리 퍼뜨린, '숨은 공로자'다. 미국 내 CJ E&M 영화 배급, 엠넷(MNET)과 티비엔(tvN)채널, 한식 브랜드 '비비고(bibigo)', 케이콘(KCON)을 총괄하면서 한국 드라마·영화·음식 통합 홍보 마케팅을 이끌었다.
5면에 따로 소개된 기사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도 살짝 맛보고 넘어가자.
한국 문화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 주요 부문을 석권했고,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는 빌보드·유튜브 신기록을 세우며 케이팝(K_POP) 열풍을 이끌고 있다......
'한국 1세대 여성 사업가' 조안리 스타 커뮤니케이션 회장이 그의 모친이다. 킬로렌 CEO는 "어머니에게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 정신을 배웠다"라며 "여성들이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성신문> 이세아 기자
내 눈에 들어온 건 5면 기사 마지막 단락이었다. 안젤라 킬로렌의 어머니는 조안 리. 꺄~~~악! 조안 리의 딸이었구나. 마치 잊고 지내던 여고 동창생 모녀 소식을 한꺼번에 만나기라도 한 양 나는 환호를 내질렀다. 왜? 내가 조안 리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책이며 그의 글을 읽는 적이 있고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영화 <에놀라>의 모녀를 보는 기분이랄까. 최강 모녀 우리 딸과 나를 보는 기분이랄까. (과했나?)
딸 안젤라 킬로렌과 엄마 조안 리
조안리(이조안,1945 ~ )는 '한국 1세대 여성 사업가'라 불린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당시 초대 학장이던 케네스 킬로렌(한국이름 길로 연, 아일렌드계 미국인. 대한민국 귀화 외국인 1호. ) 신부와 26세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얻어 결혼하였고 두 딸을 두었다. 결혼 당시 조안 리는 23세, 길로연 신부는 49세였다. 조안리는 49세 무렵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성공>을 출간했다.
세계 최대 PR 기업 버슨미스텔러 한국지사 사장, 전문직 여성들의 국제봉사 단체 존타(ZONTA)의 한국 여성 최초 아시아 지역 총재 등을 거쳤다. 1999년부터 탈북자들의 국제법상 난민 지위 획득을 위해 유엔 청원 운동 본부에서 대외창구 역할을 했다. 2006년부터는 국제백신연구소(IVI) 고문과 한국후원회 부회장으로 제3국 어린이를 돕고, ‘윈 문화포럼(Women & Culture In Network)’ 공동 대표로 활동했다.
조안리가 설립한 <스타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국제 네트워킹을 통해 국제 비즈니스상의 난제를 해결하고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일을 했는데,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 북아일랜드에 한국 공장을 진출시켰으며, 전투기를 파는 등의 역할을 했다.
조안 리 이야기는 그의 책 몇 권 소개하면 되겠다.
어머니에게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 정신을 배웠다.
안젤라 킬로렌
안젤라 킬로렌은 말했다. 어머니에게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정신을 배웠다고. 뚝심과 개척정신.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내가 딸에게 이 말을 들은 듯 가슴이 벅차다. 이 땅에서 딸한테 이런 말 들을 수 있는 엄마가 얼마나 될까.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딸을 최고 인정하는 사람도 어머니였지만, 내 발목을 잡고, 내 앞길을 막아서는 사람 역시 어머니였다. 우리 어머니만의 모순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딸이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길, 나는 응원하는 엄마이고 싶다. 누가 아니겠는가. 뚝심과 개척정신을 엄마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딸, 상상만 해도 울컥한다. 내가 겪었던 그 모순과 답답함을 딸은 반복하지 않아야 하리. 엄마 때문에 흔들리고, 엄마 때문에 궤도 수정하고, 엄마 때문에 주저앉는 일은 없어야 하리. 영하 18도 속에 두 시간 걸은 날, 안젤라 킬로렌과 조안 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 딸과 나의 미래를 생각한다.
딸과 나, 우리도 서로를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아니, 우린 최.강.모.녀. 지금도 같은 고백을 하며 자기 길을 내고 있다.
"엄마에게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정신을 배웠다."
"딸에게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내는 뚝심과 개척정신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