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의 말을 쓰고 보니 어제 막내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구나. 두 달 전에 넌 분명 재수 실패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더랬지. 엄마도 '재수 실패하고 삼 수 시작할 딸에게'라고 글을 썼고 말이야. 이제 다시 '추합 통보받은 딸에게' 축하글을 쓰고 있으니, 거짓말 같긴 하네. 사람 일 모르는 거다 그치? 거짓말이 아니라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지? 최초 합격자 중에 등록포기자가 나온 거겠지? 추합은 패자부활전 같다 그치?
딸아, 그래서 더 크게 축하하고 모두 함께 기뻐했구나. 너의 수고와 기다림, 너의 눈물, 그리고 너의 실패까지도 엄만 축하했었잖아. 그리고 이젠 단념하고 삼수 시작했던 너.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요즘인데 날아온 추가 합격 소식이라니! 너의 새로운 시작을 크게 축하해! 네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맘껏 누리렴!
직장에도 어제 바로 알리고 축하받으며 퇴근했구나. 민원대에 갑자기 한 사람 빠지면 남은 직원들이 얼마나 힘들까, 그게 너의 고민이었지. 일하는 형편을 아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게 왜 미안하지 않겠니. 추가 합격 통보가 이렇게 늦게 올 줄 상상이나 했겠니. 그러나 네 중심으로 생각해야 할 때였지. "우리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라"라는 팀장님과 동료들로부터 열렬히 축하받았더구나. 그것 봐. 직원 비상회의를 해서 바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던?
딸아, 참 좋은 경험이었지? 앞으로도 그렇게 가려무나.
우리는 다른 사람 걱정 너무 했지 뭐니. 자신에게 솔직할수록 다른 사람과 더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엄마도 늦게 배우고 있잖아. 다른 사람 염려하고 배려하느라 내 입장과 감정을 얼마나 속이며 살았는지 몰라. 알고 보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가장 우선 책임이 있더구나. 내가 뭘 원하는지, 내 감정이 어떤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안 해도 될 남 걱정을 사서 한 경우도 많더구나. 아빠도 그랬잖아. 자기가 분명한 방향과 태도를 보일수록 상대도 자기 입장을 더 분명히 한다고 말이야. 딸아, 씩씩하게 너의 길을 그렇게 가려무나.
엄마도 그걸 인정한 후부터 삶이 달라졌어. 내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었어. 나는 여자란 이름으로 엄마와 아내란 이름으로, 그리고 공동체란 이름으로, 남의 고민을 너무 뒤집어쓰고 살았지. 이젠 그렇게 살지 않잖아. 충동을 죄악시하던 엄마가 이젠 내 기분대로 저지르는 재미도 즐기며 살지. 어제도 기쁨의 지름신이 왔지 뭐야. 우리가 회원으로 있는 여성 단체 두 군데에 은밀히 특별 후원금 조금씩 보냈어. 네 추합 축하로 쏜 거야. 코로나 때문에 어려운 단체에, 모이고 밥 사고 할 수도 없으니 후원금이 좋지 뭐니.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그 말 맞잖아. 모녀가 같은 단체에 후원하며 회원 활동하고 있으니 이런 기쁨 함께하는 게 맞지. 그런데 네 추합이 '회원 소식'으로서보단 '회원의 딸 소식'으로 소비될 수 있음을 보았구나. 엄마와 상관없이 회원 소식으로 대하라고 강조할 걸, 아쉽더구나. 너도 나도 한 사람의 회원이잖아. 너는 엄마 딸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성인 여성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여성 단체를 후원하는 회원이지. 물론 엄마가 더 오랜 회원이고, 온 오프로 회원들이 엄마를 더 많이 아는 건 사실이야. 그럼에도 관심과 축하는 네 몫이어야 했어.
우리 모녀가 공유하는 고민과 닿아 있다는 거 알겠지?
우리 사회의 연령과 세대 간의 단절 말이야. 성별 단절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하는 토론 모임에서 20대부터 50대까지 서로 평어 쓰는 것도 그걸 극복해보려는 노력이지. 여성 단체가 아주 수평적인 편이지만 결혼, 출산, 나이 상관없이 서로 자매로 소통하고 연대하는가? 엄마 세대 딸 세대가 동등한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는가? 이건 앞으로도 우리가 더 공부하고 실험하며 노력할 주제구나 싶었어. 이게 극복되지 않으니까, 젊은 세대는 따로 단체를 만드는 거 같아. 이 문화가 변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또다시 분리되지 않을까?
딸아! 너의 추합은 아무리 기뻐해도 지나치지 않을 소식이었어. "감사합니다~~" 소리지르며 엄마가 데굴데굴 굴렀잖아. 기쁨에 겨워 엄마가 또 뭘 했개? 예약해 둔 자연생활교육원에 입금하고 기차표도 샀어. 혹 변동 생길까봐 결제는 안 한 상태였거든. '내 몸 사랑 겨울여행'으로 다녀오고 석 달 만에 다시 가네. 엄마 생일 축하로 예약했고, 딸 합격 기념으로 결제했다는 말이야. 2월 22일부터 9박 10일간 엄마는 떠나 있을 거라 그랬잖아. 딸은 새 학기 준비에 미리 듣는 한 주간 강의 때문에, 연가를 쓰고 퇴사하게 되겠지.
딸이 엄마한테 했던 말 엄마는 늘 잊지 않고 있어. 엄마와 딸로서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만나야 한다고 네가 그랬지. 같이 성장하고 연대해야 가능하겠지. 너의 엄마로만 산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이대로도 엄만 만족하며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에서 우리가 만나자면 아직 할 일 많은 엄마가 맞아. 자기 목소리와 역할을 가진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각자 잘 살아야 사회에서도 대등하게 만날 수 있다고 했지. 맞아. 미래 세대를 엄마는 부지런히 배워야 해. 우리는 최강 모녀 연대로 사회에서 잘 만나며 살아갈 거야. 암암.
이번 여행도 엄마가 그렇게 성장하기 위한 투자야.
딸이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으니 엄마도 더욱 분발하려 해. 네가 가는 길이 돈과 노력과 시간이 엄청 드는 공부라는 거 알아. 직장 3년 벌어 모은 돈은 몇 학기 등록금이면 바닥나겠지. 그래도 엄만 걱정하지 않아. 우리 소득 수준이면 국가장학금도 좀 기대할 수 있겠지. 돈 때문에 미리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거 우린 알고 있으니까. 네가 이 사회에서 하고 싶은 그 일을 할 때, 엄마도 엄마가 원하는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을 거야. 우린 서로를 응원하는 최강 모녀니까!
때맞춰 설 연휴로구나. 막내만 빼고 네 식구 영화 <새해 전야>를 보게 됐네. 2050이 함께 연애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맛이 엄만 무지 기대된단다. 딸 혼자는 그런 영화 절대 취향이 아니라 그랬지? 네 오빠도 마찬가질 거야. 여자친구 없이 혼자 연애 영화를 보러 가겠니? 중년 부모와 성인 딸 아들이 누리는 특수 아니겠냐. 커리어와 결혼이 늦어지는 시대에 코로나 명절까지 거드는 특수 말이야. 너희들의 느낌과 목소리를 들을 기회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다시 오지 않을 특수 아니겠니. 우리끼리 떠들며 신나게 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