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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교사 Oct 20. 2019

자퇴를 하는 너에게

18살, 너무 이르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때의 이야기

“선생님 저 오늘이 학교 마지막이에요”

“에이 농담할 걸 해라 쨔샤”

“진짜에요 저 자퇴해요”

“에이 뭐라고 하는거야 고만 놀려 안 속아”


참 결이 예쁜 아이다. 수업시간에 자주 정수리를 보여주거나(=엎드려 자거나) 횡설수설 이야기하긴 했지만 적극적이고 동기부여만 되면 학습욕이 정점을 찔러 열심히 참여하는 예쁜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도대체 믿지 않는 선생님이 답답한지 옆에 있던 친구가 거든다. 


“쌤, 진짜 얘 내일부터 학교 안 와요 진짜 자퇴해요”

“...뭐라고?”


자퇴라니 

내 짧은 교사 인생에 자퇴라는 단어는 그저 노래 가사나 요즘 젊은 창업자들이나 기업가들의 성공기에서나 보던 참 무서운 단어였다. 그런 단어가 내 삶에 훅 들어오니 어안이 벙벙했다. 곧이어 질문 하나가 따라온다. 


“...왜?”


“그냥 저 하고 싶은 걸 찾아보려고요. 저 학교와서 맨날 자는 거 아시잖아요.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뭐든지 해보려고요.”



그렇구나! 그래! 응원할게! 



라고 나는 결코 쿨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만약 어쩌다 클릭한 영상의 유투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응원합니다’ 라는 다섯글자를 쉽게 적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고 내 말의 영향력이 적기 때문일까. 그러나 일주일에 두 번씩 한 공간에서 교감하고 소통하던 녀석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내가 고민이 많아졌다. 



오기 싫은 학교일 지라도 미성년자일 때는 그나마 학교라는 울타리가 너를 보호해줄 수 있는데, 

맨 몸으로 나간 사회는 정말 춥고 아프게 느껴질텐데, 

물론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했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좋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하고 싶은 걸 찾는다는 너의 말이 왜 이렇게 곧 깨질 유리처럼 들릴까, 

최소한 학교에서 하기 싫은 것도 해보는 지구력이라도 쌓아보면 안 되겠니, 

듣기 싫은 소리도 하기 싫은 것도 해봐야 정말 네가 단단해질텐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 소리는 그 날 퇴근 후에도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따뜻한 쓴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정말 꼰대인가? 스스로를 점검하다가 또 혹시라도 내가 해줘야 할 말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다가 그렇게 자아 분열이 일어날 뻔 했다. 학교가 울타리가 아니라 감옥같이 느껴졌을 아이에게 이런 나의 마음의 소리가 그 마음에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걸 알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 날 하룻밤을 내 마음에 담아두었다. 혹 다른 이유가 있을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함부로 훈수를 두거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잘 될거야’라는 듣기 좋은 소리만 하기엔 그건 방임에 거짓말이 분명했다. 쓴소리를 해야하는 의무가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그 날 밤 한참을 마음앓이를 하다가 이 모든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새로운 일들에 기대 반 걱정 반일 아이가 보고 갑분싸 할 만한 그런 메시지를 말이다. 따뜻한 쓴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으면서. 




마지막 숙제

자퇴처리를 위해 다음 날 학교를 방문한다며 인사드리겠다는 아이에게 학교 카페의 시그니처인 스무디를 사주겠다며 데이트를 신청했다. 감사하게도 아이의 결정을 함께 걱정하시고 보듬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아이의 다른 과목 선생님과 셋이 함께 교정을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결정에 대한 깊은 이유와 미래에 대한 계획, 그리고 기타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의 얼굴에는 우선은 더 열심히 놀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보이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계획에 대한 확신이 보이다가 이내 곧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걱정이 비친다. 그래 학교가 꼭 정답은 아니지. 그냥 원래 있는 길이라서 누구나 보통은 그 길 위에서 재능을 찾고 끼를 키우고 배워 나가지만 네가 다른 길을 가겠다면 그것도 또 새로운 길인거네. 그 선택에 후회 없도록 만드는 게 네 몫인데 분명 쉽지 않을 거야. 힘들거야. 무엇보다 스스로를 더 잘 관리해야 하고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져야 할거야. 이제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물리적인 대상도 없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을거야. 그래도 포기하지말고 뭐든 적극적으로 부딪혀서 꼭 하고 싶은 걸 얻어내렴. 물론, 법을 지키는 한해서! 네 선택을 말리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응원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이제 자퇴하면 내가 널 지도할 권한도 의무도 없지만 그래도 성인의 나이가 될 때 까진 한 달에 한 번씩 꼭 연락해주겠니? 마지막 숙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하는 꼰대짓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나니 무모해보이지만 용기있는 선택에 온전히 박수칠 수 있데 되었다. 아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정말 파이팅이다! 참 예쁘고 빛나는 너의 시간을 마음으로 응원한다! 성인이 될 때 까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핑계로 네가 기댈 곳, 소통할 곳이 되길 바라며 



18살. 인생의 무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책임지기에 이르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나이. 그렇다고 나이가 든다고 책임을 지기에 충분할 만큼 지혜로워 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서른이 된 나도 내 인생에 미안한 선택을 할 때가 잦다. 학교가 배움의 전부가 아니기에 학교를 졸업했다고 배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듯, 우리 인생 전 여정에서 시도하고 느끼고 나누고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과 마음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하고 느끼고 나눴다. 그리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끝에는 더 이상 학교에서 못 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친구처럼 그리고 선생님으로서

아이들과 배우고 농담도 주고 받고 일상도 나누며 지내다보면 이따금씩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나아가는 성인처럼,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적지 않은데 스스로 어리게 생각해서 그런가) 그럴때면 내가 그 나이 때 어땠지를 생각해보며 아 아이들 인지나 감성이 이쯤이려나? 하고 짐작을 하며 다시 친구처럼 또 선생님으로의 역할에 충실히 한다. 


친구처럼은 귀만 열고 들어주는 것, 선생님으로의 역할은 시쳇말로 쉽게 말하면 꼰대짓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건 나의 꼰대짓은 소위 말하는 꼰대짓과 아주 조오금 다르다는 것.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맞다고 내 말을 들으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뭔가 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부여와 작은 넛지 역할.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너는 어떠니? 네 인생은 어떤지 궁금하고 앞으로는 어떨지 기대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  우리는 각자 다르니까. 누구나 스스로가 자신만의 정답을 알고 있고 각자의 여정을 만들어가고 있다.  수많은 선택들이 만나고 교차되고 엮이며 세상사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이어져 간다. 감옥같은 학교든 울타리같은 학교든 이곳에는 수많은 인생들이 엮여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 



매월 9일을 기다린다. 아이의 한 달에 한 번씩 연락하기로 한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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