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다가오면
볼프 에를브루흐 글, 그림의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를 만나 보자.
앞표지에는 오리가 목을 쭉 뻗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뒤표지에는 튤립 한 송이가 살짝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떤 이야기일 것 같은가? ‘내가 함께 있겠다’는 말과 주인공일 것 같은 오리, 그리고 튤립. 그림 요소와 제목이 연결이 되는가? 연결하기가 쉽지 않아 무슨 이야기일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면지는 표지 배경과 동일한 배색으로 표현되었다. 표제지에는 표지의 오리가 왼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모습이고, 약표제지에서는 서로 마주 보며 걷는 오리의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위로 왼쪽, 오른쪽 돌리는 모습의 오리는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얼마 전부터 오리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죽음이 말했습니다.]
글과 함께 뒤돌아 선 오리 뒤에는 옷을 입은 해골이 다가와 있다. 해골의 손에는 뒤표지에서 보았던 빨간 튤립이 들러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고 모두 이제 알아차렸을 게다. 이 그림책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임을.
나는 이 그림책을 처음 보았을 때, 죽음을 어떤 이미지로 그리면 좋을까 고민되었다. 처음에는 해골 이미지가 무섭고 강하기도 하고, 전형적인 느낌이 있어서 해골로 표현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해골보다 더 좋은 죽음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혹시 죽음을 표현할 멋진 이미지가 생각나는가?
깜짝 놀란 오리는 죽음에게 지금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죽음은 말한다. 그동안 쭉 오리 곁에 있었다고. 만일을 대비해서.
죽음이 우리와 쭉 함께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죽음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무언가를 대비하는 일이 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연상이 되었는데, 죽음이 만일을 대비해서 우리와 함께했다니 기분이 어떠한가? 별로 유쾌한 일로 생각되지는 않을 것 같다.
오리와 죽음은 친구가 된다. 둘은 서로를 위하며 꽤 괜찮은 친구가 되어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리가 늘 놀던 연못이 아니라 새롭고 해보고 싶었던 나무에 오르는 일도 해본다.
만약 내게 죽음이 오면 어떨까? 이렇게 오리처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와 죽음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오리가 겁내지 않고, 죽음을 거부하거나 내치지 않음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죽음과 친구가 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담대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연결되었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죽음에게 어떤 질문을 할까? 그리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죽음은 이런 말을 한다.
[사고가 날까 봐 걱정해 주는 것은 삶이야. 삶은 감기라든가, 너희 오리들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걱정하지…….]
삶은 걱정과 함께하는 과정이라니. 죽음이 말한 삶의 정의를 듣고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다.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많은 일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일어나지 않을 일까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자신이 참으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며 자부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가 걱정하고 내리는 결론은 참으로 감정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실제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은 것을 알면서 우리는 불안해하며 걱정한다. 대체 왜 걱정을 하는 걸까? 걱정을 위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 늘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감정적인 동물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의 얘기처럼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에 나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리가 자신이 죽으면 연못이 사라지겠다고 걱정하자, 죽음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져.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죽음은 어찌 보면 저승사자와 같은 상징적 존재이다. 마치 오리는 자신을 찾아온 저승사자에게 자신이 죽을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것 같다. 나도 똑같을 것이다. 남은 가족과 친구들이 아파할 거야. 아직 해보지 않은 일이 많아.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그럼 죽음이 말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 너 대신 누군가가 그들을 보살펴 줄 거야. 내가 사라지면 나에게 의미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이야기는 중반부에 다다른다. 그림에서 갑자기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까마귀를 불길한 새라고 여기며 죽음의 상징으로 쓰인다. 한국에서도 죽음을 알리는 새로 까마귀를 꼽는데, 까마귀의 검은색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 속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새로 효를 상징하는 새로 인식되기도 한다.
다음 장면에서 오리는 몸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추위를 느낀 오리는 죽음에게 춥다며, 나를 좀 따듯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림에서는 오리는 죽음의 두 손을 잡고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는 추위를 느낀 오리가 죽음에게 따듯하게 해 달라니? 죽음은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죽음을 춥고 차가운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죽음에게 따듯하게 해 달라는 오리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고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이야기는 결말로 다다른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오리는 더는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죽음은 오리를 조심스레 물 위에 띄우고 살짝 밀어낸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이야기에서 죽음은 걱정을 하는 것도 삶이고, 슬퍼하는 것도 삶이라고 한다. 우리는 좋고, 행복하고, 긍정적인 일만이 삶이라는 좁은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는 걱정과 슬픔 역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일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니 걱정과 슬픔 앞에서 조금 더 의연해지면 좋겠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다. 마지막 장면은 펼침면이 아니라 왼쪽 한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글 없이 그림만 보이는데 죽음이 토끼와 여우 사이를 거닐고 있다. 오리와 함께 죽음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죽음이 계속 우리의 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처음에 죽음을 왜 해골로 그렸을까 다소 불만스러웠는데, 이제 해골이야말로 죽음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나타낼 그럴싸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여서 그렇다. 해골은 우리의 일부이지 않는가! 인간의 뼈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으니 해골처럼 죽음의 특성과 딱 들어맞는 그림이 없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죽음을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많은 죽음교육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교육은 삶의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더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