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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Oct 04. 2021

재난에 대처하는 호주인들을 보며.

공동체는 어떻게 역사를 만드는가?

100년 만의 큰 홍수를 겪고 2주가 지나도록 마을 사람들은 재정비와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보통 1월이면 사람들이 긴 여름 휴가를 떠나고 농부들은 제각각 농장에서 추수에 한창이라 마을이 한적했는데, 올해는 아주 달랐다.

나도 피해를 입은 지인들 집을 돌며 삽질도 하고 빨래도 가져다가 빨고 임시 거처가 필요한 이들에게 잠시 빈방을 제공하기도 하고 이재민이된 이웃을 불러 저녁을 같이 먹기도 하며 일상에 없던 일들을 하느라 매우 바빴다. 이들은 흔히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우 불행한 상태였지만 또 가끔은 전혀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 문화 차이를 느꼈던 것을 정리해보겠다.


1.   유머

홍수가 나서 물이 차고 넘치던 날, 자기 집이 다 가라앉아 동네 숙박업소(캐빈)로 대피 온 노부부를 만났다. 정신없이 대피를 오셨는지 옷도 머리도 평소와 달리 엉망이었다.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나 : 어휴.. 뭐라도 좀 챙겨서 나오셨어요?

할아버지 : 음.. 내가 먹을 약을 챙겼지. 그것만 해도 한 보따리거든.ㅎㅎ

할머니 : 난 핸드폰을 챙겼는데 충전기를 깜박했지 뭐야. 근데 이 옆집에 피난 온 아줌마가 같은 핸드폰을 쓰더라고. 충전기를 빌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지. ㅎ


다음날 이 노부부의 집을 잠시 같이 들르게 됐는데, 아들이 물에 안 잠긴 뒷마당 한쪽에서 골프공을 찾아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자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로 스윙을 하며, “어! 지난봄에 저쪽 언덕에서 친 볼이 여기까지 날아와 있었네! 히야!” 하신다. 살던 집은 가라앉고 제 몸은 불편한데, 알짱대는 동네 꼬마를 귀챦아 않고 그런 농담을 하며 웃을 수 있다니 참 놀라웠다. 이들은 돌아서서 눈물지으며, ‘차라리 죽어야지, 더 살아 뭐하나’ 비탄을 하다가도 웃움짓고 농담하고 삶을 즐긴다.  


2.   여유

지난 주말, 마을 운동장에서 홍수 피해자를 돕자는 기금 마련 자선 크리켓 경기가 있었다. 주최 측은 소시지나 음료수를 팔아 모금을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춰 봐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모금액수는 그리 크지 않다. 동네 사람이 많이 와도 소시지 가격 등이 그리 비싸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날은 하필 40도를 넘나드는 쨍하게 더운 여름날이었다. 한참 추수에 바쁜 농부들 피해복구에 바쁜 이재민들 주민들이 팀을 이뤄 친선 경기를 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날도 덥고 몸도 힘든데 왜 따로 경기를 해야 하는지. 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덥고 힘들지 않을까? 그냥 몇 사람이 집집마다 모금함을 들고 다니며 거둬도 비슷한 액수가 모일 듯한데 말이다. 


평소에는 너나없이 들락이며 무료로 보던 경기를 이 날은 적은 액수지만 입장료를 받았는데 사람들은 또 군소리 않고 다 돈을 내고 들어왔다. 간만에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을 소식도 듣고 서로의 안부도 물으며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재민들도 시궁창 내 나는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일상복을 입은 채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하긴 이런 핑계라도 만들어야, 끝나지 않는 일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게다. 이웃들이 날마다 내 집에 찾아와 걱정을 늘어놓지 않아도, 내 형편을 걱정하고 관심을 갖고 있구나 위로도 얻고 또 나를 위해 뙤약볕 아래서 뛰며 경기를 치른다는 것이 격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기록에 대한 애착

마을 한복판엔 이 마을의 역사를 보관하는 작은 박물관(가정집 만한 규모의)이 있는데 역시 홍수로 피해가 컸다. 각종 자료와 사진들이 물에 잠겼다. 역사연구회(Historical Society) 회원들은 이 사료들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급한 데로 집에 있던 냉장고를 비우고 물에 젖은 자료들을 그곳에 보관할 정도였다. 한 장씩 따로 말려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더운 날씨에 자료가 썩을 까 봐 염려하는 것이었다. 일손이 필요하다 해서 그 자료 말리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 떡이진 서류철을 한 장씩 한 장씩 떼서 교회 홀의 탁자 위, 마루 바닥 위에 늘어놓고 선선한 그늘에서 말리다가 뒤집고, 다 마르면 다시 모아 철을 하고 다음 서류철을 냉장고에서 꺼내 또 한 장씩 떼서 늘어놓았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몇 월 며칠 대장간 집 막내딸로 태어난 아무개가 어찌어찌 자라 푸줏간 집 둘째 아들과 결혼해 누구누구를 낳고 살다 갔다는 등의 자잘한 개인 삶의 이야기들. 도대체 이런 기록들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기에 이토록 애지중지하며 한 장씩 뜯어말리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쾌쾌하고 눅눅해진 누릿한 종이를 한 장씩 만지며, 그 위에 누군가가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펜글씨 들을 보며, 그 안에서 그냥저냥 살다 간 옛 마을 사람들의 인생을 한 명씩 마주하는 일이 꽤 즐거웠다. 이들이야 말로 이 마을을 일구고 역사를 만들어낸 주인공들이지 않은가!  영웅과 위인의 업적에 집중하는 역사가 아닌 민초들의 인생 이야기가 따뜻했다. 이들 자료의 상당수는 이미 전산화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달쯤 지나자 마을 발전 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파티 초대장이 날아왔다. 주제는 홍수였다. "아자! 아자!  스킵 튼"이랄까.  무너져 내린 다리와 집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설계하고 홍수 때 찍은 사진이나 그림, 홍수에 영감을 받아 지은 시나 이야기 내지는 이번 홍수와 관련해서 뭐든지 들고 와 한자리에서 같이 나눠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흠..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들고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인가.     


난 지난 몇년간 같이 활동해온 마을의 사진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모아 디지털 액자에 담아 일찌감치 주최 측에 넘겼다. 그날 다른 모임이 있어 파티가 끝날 즈음인 밤 10시가 되어서야 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많이 떴다는데 아직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장을 놓고 하고 싶은 얘기도 듣고 싶은 얘기도 끝이 없다. 동네 사람들이 한쪽에서 라이브 음악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궜다.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이 Flood(홍수)로 오행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이 잠기고 친구 집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여 모래주머니를 쌓는 모습들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어 있었다. 아픔 놀라움 슬픔 등등의 감정이 꾸밈없이 드러나 있었다. 학교는 이렇게 삶과 연관된 소재로 백일장이나 미술대회를 개최하고 삶의 현장인 마을 회관에 전시를 해 온 마을 사람들이 감상을 하는구나 놀랐다.


의외로 너무도 다양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는 이들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고무보트를 띄우고 신나게 물놀이하는 모습도 있었다. 나도 꽤 홍수 진행 과정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저마다 자기 주변에서 겪은 상황과 풍경은 매우 색달랐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사진들을 보며 또 깊은 얘기를 이어갔다. 역사연구회 사람들은 이번에는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일일이 녹음을 했다. 동네 박물관을 복구하는 데로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사료들을 그곳에 보관할 거란다.     


 동네 사진 클럽에서 디지털 액자안에 사진들을(오른쪽) 담아 전시했다. 나도 멤버여서 사진 여러 장을 보탰다.

대학교 시간 강사인 옆집 조각가 엄마는 진흙이 뒤덮여 남루하게 망가진 나무 조각 작품들을 그대로 들고 와 전시했다. 어떤 남자는 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바닥과 벽을 뜯어냈는데 그 안에서 50년도 더 지난 신문들을 발견했다며 들고 왔다. 누렇게 변색됐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좋았다. 일본이 항복했고 2차 대전이 끝났다는 엄청난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들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매우 감격해했다. 두툼한 앨범에 꼼꼼히 정리해 온 자도 있었고 저마다 액자나 마운트나 색종이 위에 떡떡 붙인 사진들이 수백 장을 넘었다.     


밤늦도록 대화는 끊기지 않았고 시골 아이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뛰놀고 너무도 즐겁고 따뜻한 파티였다. 홍수가, 재난이 이런 즐거움도 불러오는구나 싶었다.      

아이들도 야밤에 만나 노느라 신이 났다.



그리고 몇 달 뒤  이번엔 출간 기념회가 열렸다. 홍수가 일어난 뒤  1년 내내 치우고 재건하고 함께 했던 일련의 과정들, 여러 정신건강 세미나나 마을 복구 공청회 등 역사의 순간들을 모아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백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모였는데 사진집을 손에 들고 한 장씩 꼼꼼히 보며 힘들었던 그 시간을 되돌아보는 듯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찍은 사진을 출간 위원회에 보내준 작가들에 대한 감사, 수천 장에 이르는 사진을 몇 달간에 거쳐 정리하고 편집한 이들에 대한 감사, 출판비를 지원해준 지방 자치 단체에 대한 감사가 끊이지 않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출간 작업에 참여를 한 것이다.  

지역 정치인이 (구청장쯤 되려나) 등장했다. 형식적인 감사패 전달 따위는 없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스피치를 한 마디씩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마음에 다가왔다. 

"우리 마을에 마을의 역사를 관장하는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거예요. 우리는 그곳에서 홍수에 대한 자료를 샅샅이 뒤졌어요. 100여 년 전에 홍수가 있었다는 기록 사진이 딱 한 장 있더군요. 그때 누가 사진기나 있었겠나, 살기 바빠 역사를 남기겠다는 생각이나 했겠어요. 지금 살아있는 우리 중에 그때의 홍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가 우리는 최근 두 번이나 홍수를 맞았지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다음 세대'에게 알려 줘야만 합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역사' '다음 세대'라는 말들이 반복되었다.     

이 마을에서 자라고 대도시에 나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여인(완쪽)이 말한다. "도와 달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동료 직원들과 의논했어요. 동료들도 언론에서 뉴스를 보고 피해 마을에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차라 모두들 흔쾌히 팔을 걷고 나섰지요.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우리가 오히려 행복합니다."  무수한 자원 봉사자와 재능 기부자 마을 사람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을 함께 만든 것이다.     


다큐도 제작했으나 개봉과 판매는 2년 뒤에 하겠단다. 아직 수재민들의 감정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상처를 긁거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단다. 개개인의 상처를 일일이 배려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아직도 기록 작업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모든 수해 장소와 수재민들이 완전히 예전 상태로 돌아갈 때 이 홍수 기록과 복구 작업을 마칠 것이라고 했다. (2012/1/8 씀)   


우리는 옆방에서 차와 케잌을 먹으며 밤늦도록 이야기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너의 이야기를 듣던 자리였다.


4년 뒤 다큐도 완성됐다. 제목은 I don't know what we will call this flood. 마을과 주민들이 얼마나 그 피해로부터 복구되었는지, 모든 계획들이 예상대로 진행되었는지를 마저 취재하여 예정보다 2년을 더 작업하여 다큐를 마무리했단다.

이제 홍수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히 멀기만 한데, 돌아보니 피해의 잔상은  남아 있었다. 가령, 홍수 뒤 영업장을 확대해서 재개업을 한 가게도 있지만, 엄청난 복구비용을 감당치 못해 가게를 다시 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팔아치우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던 이웃도 있었다. 제작비 지원은 지역 카운실, 주민들의 자원봉사로 기록됐다. 이 영화는 20불에 판매했고 기금 또한 피해자들의 삶을 지원하는 일에 쓰였다. (2014/5/22 씀)


놀라웠다.

첫째, 어쩌면 평범한 규모의 재난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까지 치밀하게 장기적으로 꾸준히 작업하고 관심을 놓지 않는 모습이. 재해가 나면 서둘러 모금하고 정신없을 때 온갖 정치인이며 기업인이며 한꺼번에 방문해 법석 떨다가 그냥 그렇게 잊어버리고 묻어두지 않았다.     

둘째, 정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10원 한 장 받지 않고 재능을 기부하고 시간을 쪼개 내어 봉사하는 사람들이.  평범하고 수수한 시골 아낙들이 뒤에서 조용히 이런 거창한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들의 의식과 실천력을 알게 될 때 이들이 과연 내가 알던 그 아줌마, 할머니가 맞나 싶다. 

셋째,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음 세대'를 배려하는 각도가 참으로 달라서.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생각해봤다.

역사란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내 이야기, 네 이야기, 우리 사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그런데 놀라운 건 세상엔 단 하나도 같은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같은 지역에 살아도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직업이 같아도 우리 개인은 하나같이 중복되지 않는 인생을 산다. 고로 세상엔 70억 개(세계 인구가 70억이라면)의 서로 다른 이야기와 70억 개의 전혀 다른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자기 이야기를, 역사를 나름대로 기록할 이유가 있다. 아무리 사소하고 지루한 일상일 지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스킵튼에서 보낸 좀 특별했던 시간들을 작은 책으로 정리해봤다. 우리 모두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로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어야 한다. 누군가 자기의 삶을 사는 중에 내 역사의 장을 잠시 기웃거려준다면 반가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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