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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15. 2021

호주 시골, 헛간 '파티'의 주제는?

마을 역사 연구회를 쫓아갔더니.

기념비가 제막을 앞두고 호주 국기에 덮여 있다.

이웃마을 리스모의 역사연구회(Historical Society-지역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 마을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데 이런 소규모 단체의 활동이 호주 전국적으로 매우 활발하다.)에서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호주 정부는 1차 대전을 마치고 돌아온 용사들에게 리스모와 이 일대의 거대한 토지를 감사의 뜻으로 무상으로 하사했단다. 그 용사들은 낯설고 척박한 이곳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땀 흘려 일하고 농장을 일구며 일가를 이루었다. 몇 세대를 내려오며 비옥한 농장으로 거듭나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이 땅에 조상을 기리고 마을 역사를 기록한 작은 돌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곳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서로 다른 4 가문은 한때는 이웃사촌이었다가 사돈도 되었다가 하며 지금껏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고, 타지에 나가 살던 자손들까지 이날은 고향을 찾아왔다. 역사에 관심 있는 마을 사람들, 지역의 각계 리더들도 모였다.    

호주는 땅이 넓은 나라다. 처음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 이주민들은 남는 땅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탐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청춘 때 주연으로 나왔던 '파 앤 어웨이'(Far and Away)란 영화를 보면 비록 배경이 미국이긴 하지만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냥 말 타고 한참을 달려 나간 뒤 남보다 깃발을 먼저 꽂으면 내 땅이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장난하듯이. 그러니 호주 정부가 여러 공을 세운 전쟁 용사들에게 수천만 에이커의 땅을 기꺼이 하사한 것은 놀랄 일이 못됀다. 몇 세대가 지나며 그 후손들은 번성하였고 아직도 그 땅을 고스란히 지키고 산다. 

저 멀리 벌판으로 노란 유채들이 슬슬 올라오고 있다. 기름으로 유명한 카놀라 꽃인데 이 지역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시즌이 다가오면 천지사방 온 벌판이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다.     

블루스톤 울 셰드

간단한 제막식을 끝내고 농장 안에 있는 울 셰드(Wool Shed)에서 뒤풀이(Afternoon Tea)가 있었다. 수천 마리 양들의 털도 깎고 하는 작업장, 헛간에서 파티를 한다니 놀랍기도 하고 호기심을 당기기도 했다.   

 

오래된 블루스톤 하우스가 역사를 말해준다. 1800년대 초기 정착자들이 교회나 학교 등 공공건물을 지을 때 

블루스톤을 많이 사용했다. 지금 남아있는 블루스톤 건물 중 상당수가 국가 유적지(National Heritage)로 지정되어 있다. 고고하고 탄탄하고 예스러운 모습 때문인지 호주인들은 블루스톤 건물을 매우 애지중지하는데 알고 보면 애물단지 일 때가 많다. 예전에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흔하게 쓰는 자재가 아니고 또 유적지로 지정되어 특정 방식으로 보수해야 하다 보니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고 겨울엔 무지 춥다.     

헛간 안은 예상외로 너무도 아늑하고 독특한 분위기였다. 뾰족하고 높은 지붕, 절제 있게 얽혀있는 목재 골조들, 그 아래 엉성하게 매달린 전구는 따뜻했다. 블루스톤 위에 하얗게 회칠을 한 내부와 낡은 가구, 작업에 쓰는 기계들이 잘 어울렸다. 게다가 누릿하고 구리게 진동하는 양털 양똥 냄새까지 개성으로 다가왔다. 창고 차고 지하실 별 곳에서 다 해봤지만 헛간 파티는 이 날이 처음이다. 근데, 생각해 보면 별스러울 것도 없다. 한국의 농부들이 이웃들과 일하다가 논두렁 옆에서 막걸리도 마시고 새참도 먹듯이 삶의 터전에서 하는 파티란 얼마나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 평소엔 어수선한 동물들의 몸부림과 소음 냄새로 가득 찼을 헛간이 이렇게 가지런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 그저 새로울 뿐.     


그 안에서 우린 커피를 끓여 마시고 구워 온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흐르는 세월과 역사, 조상과 자손을 이야기했다. 내가 만난 호주 사람들은 참으로 자기 개인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루에도 수십 장 손으로 자서전을 쓰는 할머니가 있고 자기 조상의 뿌리를 찾아 온갖 자료를 찾아 헤매는 이도 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로 훌쩍 자료 조사차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온라인 족보 서비스 회사에 의뢰해 DNA 검사로 조상을 찾기도 한다. 

유명인들이 자신의 조상과 족보를 찾아가는 티브이 프로그램도 인기 있다. 젊은 여배우가 몇 대손 할머니의 험난한 인생 이야기를 추적하다가 오열하기도 한다. 조상이 노비이든 마녀이든 따지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혹은 취미로 자기 뿌리를 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정당한 배경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미화시키거나 별 볼일 없는 조상의 역사를 극구 감추고 없애는 것과 달리 있는 그대로를 발굴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사견이지만 가끔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의 가족을 찾는 뉴스를 종종 보게 되는데, 물론 입양아로서 자기를 낳아 준 생부모를 찾고 싶은 열망이 큰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부모 조부모를 다 아는 사람들도) 그냥 자기의 확대된 뿌리를 찾아다니는 문화가 좀 있다는 얘기다. 

    

한 곳에서 한 가지 일을 여러 세대가 이어오며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아니, 그럴 수 있다면 복 받은 것 일게다. 삼사 대가 모여 궂은 농장 일을 함께 하고 양털을 깎아 내다 파는 사이 아녀자들은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구워 이곳에 새참으로 내오고 또 푸짐한 로스트 저녁을 한 상 차려 허기진 남정네의 배를 채웠으리라. 몇 세대를 걸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이곳엔 아직도 있다.     

한 때 나는 대단히 특별한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 뒷세대에게 무언가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어 간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 건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자잘한 경험들 시간들 기억들을 남기고 싶어 진다. 위인이나 역사적 사건 말고 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나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억해야겠다. 

블로그에 내 일상이나 생각들을 되는대로 적는 것도 그런 이유일 거다. 이 자리는 내 인생의 사이버 박물관이 될 것이다.  몇 세대가 지난 어느 날 누군가가 어딘가에 적힌 비밀번호를 발견하고 빠끔히 로그인을 할지도 모르는.(2010/09/14 씀)    




그리고 나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집콕을 하며 10여 년 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하여 브러치 북에 도전을 하고 있으니 인생은 정말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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