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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28. 2021

호주 시골 갤러리, 첫 '그룹전' 이야기

아들과 함께 예술혼을 불태웠던 동네 미술관.

지난 주말 내 생애 첫 전시회가 호주 스킵튼 갤러리에서 열렸다. 지난 3-4년간 틈나는 대로 붓도 놀리고 연필도 굴리고 색연필 크레용은 물론 아크릴 유화까지 색깔 나는 모든 재료와 도구를 이용하고 도화지나 캔버스 헝겊 떼기는 물론 돌아다니는 합판까지 동원하여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스킵튼 지역 예술가들의 그룹전'에 양도 많게 20여 점을 떠 넘기고 이렇게 개막전에 참석하고 보니 나름 감개가 무량하여 묻지도 않는 소회를 나눠볼까 한다.    

부제: 나와 내 아들의 삶에 예술이 파고 들어왔다.  


스킵튼은 조용한 마을이다. 사람도 얼마 안 살고 그중에 아는 사람은 더더욱 몇 안 되는 이곳에 젖을 뗀 아들을 데리고 와 살면서, 나는 사람도 만나고 싶었고 그냥 뭔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심심하거나 우울하거나 외로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애보랴 살림하랴 밭일하랴, 하루하루는 보람차게 잘 지나갔는데 그래도 뭔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때 우리 집 언덕 아래엔 수년째 빈집으로 있던 낡은 블루스톤 주택이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 건물을 사서 보수를 시작했다. 그 앞을 걸을 때마다 도대체 누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걸까 궁금해졌다. 카페가 생겼으면, 빵집이었으면.. 나름대로 공상도 해보았다. 그런데 은퇴한 미술교사가 갤러리를 연다는 소문이 들리는게 아닌가!

그건 기대 이상이었지만 도대체 이 조용한 마을에서 어떻게 갤러리를 운영하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훗날 이 갤러리는 두 차례의 혹독한 홍수로 침수되어 문을 닫고 다시 열기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오히려 카페까지 겸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필경 내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꽤 자주 갤러리에서 작품을 사다가 집에 걸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머지않아 작은 갤러리가 문을 열었고 몇 개의 작은 방들은 전시 공간으로 완벽하게 변신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술교실까지 열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월요일 밤이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미대를 가겠다는 10대 소녀부터 70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열명 안팎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와인 한잔 마시며 그림도 그리고 수다도 떨었다. 그 두 시간이 당시의 나에겐 매우 중요했다. 무척 육아를 즐겼음에도 '나만의 독립된 시간과 공간(Me Time)'은 정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육아가 힘들다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육아의 본질이 아닌 '절망적 육아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양육자들에게 미 타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가정과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곳에서의 첫 수업은 두 가지로 기억된다.   


기억 1.   

그녀는 첫 시간이니 간단히 스케치를 해보자며 지렁이와 풍뎅이 그림을 들고 왔다. 그걸 보고 A4 사이즈의 도화지에 작은 지렁이 한 마리를 그렸다. 수강생들 사이를 오가던 그녀는 내 그림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여러분, 이 그림 좀 봐요. 지렁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요? 전에 어디서 그림 배웠어요?"

호주 교육자들은 원래 칭찬을 많이 하려고 무지 애들을 쓰는데, 그래도 이건 좀 놀리는 것도 같고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 미술 수업 이후로 그림 그린 적 없어요." (남의 그림은 좀 보러 다녔지만.ㅎ)  

 

기억 2.   

두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내가 그린 지렁이와 풍뎅이 그림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와 놀며 엄마 오기를 기다리던 아들은 내가 뒤로 감춘 것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 아들은 두 살이 좀 지나 한참 말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풍뎅이 그림을 앞에 내밀자 아들은 눈을 번쩍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뭐야?"

"풍뎅이야."

"아아~~ 끼아악... 뿡데이.............. 뿡데이.............. 으아아!!!!"

아들은 그림을 받아 들더니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점프를 해대고 난리였다. 무슨 팝스타 콘서트에 온 광기 어린 팬처럼.  

"그렇게 좋은 거야? 정말로??"   

그 모습에 너무 놀라며 두 가지 생각을 짧게 했다.

   

생각 1. 이건 피카소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내 아들에게 그림으로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는 화가는 세상에 나 밖에 없어.

생각 2. 그렇담, 난 이제 널 위해 그림을 그리마.    


가족에 대한 개념이 생겼을 당시. 이 셋은 우주인도 됐다가 물고기도 됐다. 그의 인지의 범위 안에 내가 한자리 하고 있음이 감사해서 아끼는 그림들.

시골 구석의 갤러리였지만 우아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땀에 절은 작업복을 벗고 샤워를 한 뒤 머리를 곱게 빗고 깨끗한 옷을 입고 왔다. 건축을 전공했다던 수준급 실력의 할머니도 있었고 동네 술집에서 경비로 일한다던 젊은 처자는 붓을 쥐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한방에 모여 진지하게 꽃이나 바이올린 같은 정물화를 그리고 멋진 풍경화도 그렸다. 관장은 와인과 치즈를 넉넉하게 준비해 뒀는데, 또 학생들도 틈틈이 마실 거며 주전부리를 챙겨 오기도 했다.


난 그 구석에서 코끼리 표범 개구리 백곰 토끼 하마 기린을 그렸다. "아프리카 동물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그녀는 물으며 내 옆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에서 스크랩한 동물 사진들을 자꾸만 쌓아놨다. 난 그저 아들에게 보여줄 것들을 그렸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의 시간임에도 아이를 잊지는 못했나 보다. 한 번씩은 아들이 스케치북을 들고 따라와 간식도 얻어먹고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런 시간들은 흘렀고 그곳에서 우리 클래스는 몇 년에 거쳐 온갖 실험과 모험을 하며 창작열을 불태웠었다.

작품을 들고 집에 돌아가 아들에게 공개하는 순간은 늘 특별했다. 나의 작품들을 보며 아들은 늘 감격해했고 어느 순간부터 그 또한 무수한 작품들을 내게 선물하여 기쁨을 주었다. 어느 날 아들과 널찍한 전지를 펴고 물감을 범벅해가며 손도장을 수십 개 찍었다. 그런데 이 허접한 손도장 하나하나가 너무도 감동스러웠다. 아들의 손, 그 손에서 흘러나온 힘, 여러 겹 제멋대로 섞이고 번진 물감들. 결국 그 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하나씩 가위로 오려 카드 용지에 붙인 뒤, 지인들에게 보냈다.    


안다. 그들은 나만큼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예술은 주관적인 것이고 해석하기 나름이고 알아보는 자는 따로 있어 억만금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일 있을 때마다 글을 적어 열렬히 다 보내 한 장도 내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뒤늦게 아쉽다.  

색지와 색종이 스티커를 이용한 아들과의 합작. 알파벳도 익히고 색감도 알아가고 친구에 대한 인식도 싹트던 시기라 아들과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명패로 만들어 선물했다. 내가 글자를 오리면 아들이 열심히 붙이고 그 위에 동그란 스티커를 부지런히 장식했다. 지금도 아들 방문 앞에 떡하니 붙어있다.     

친구들 생일 때마다 애용했던 카드들. 아들은 지금도 생일 파티 초대를 받으면 카드 만들 생각부터 한다.      

그는 늘 제멋대로 그리고 나는 그를 구속할 마음이 전혀 없다.   

케잌을 먹다가 밑에 깔린 금박지가 예뻐서 같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다. 우리는 늘 일상 속에서

되는대로 소재를 발견하고 주제를 찾고 자유롭게 작업했다.ㅋ     

어쨌든 나와, 내 아들에게까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일으켜주고 창작욕을 불태울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그녀에게 작은 꽃화분 하나를 건넸다.  (2012/10/2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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