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기 Mar 08. 2023

뉴질랜드 크루즈, 오클랜드와 마무리

배 위에서의 시간들

이날은 크루즈 6일간의 기항지 중 마지막인 오클랜드항에 도착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깜짝 놀랐다. 창밖으로 이웃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다에 떠있는 크루즈인데 마치 아파트 이웃 동을 마주하듯 코 앞에 건물이 보였다. 창문을 열면 대화도 가능한 거리였다. 항구에 이토록 바짝 붙어 건물들이 지어져 있다니.. 왜 그런 거지? 그러고 보니 시드니항도 건물들이 바다로부터 꽤 가까이 있기는 했다. 잘 알려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도 그렇다. 육지에서 바라보아 그 거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거주지엔 누가 살까 싶었다. 항구에서 일하는 이들이 살기엔 편할 듯하다.

오클랜드도 배에서 내려 걷다 보면 바로 도심으로 연결이 되었다. 대도시에 비하자면 규모도 작고 딱히 더 번잡할 것도 없겠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소도시 혹은 시골 항구들이 운치 있는 자연 풍경으로 매력을 뿜었던 것에 비해 좀 평범하고 개성이 없었다. 

그래도 이른 아침이라 이곳저곳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만에 보는 게 신선했고 아주 옛날 서울과 멜번에서 출근 전쟁을 벌였던 시절도 뜬금없이 생각이 났다.  

 

오클랜드 시립 미술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는데 주변엔 텐트를 치고 자는 노숙자들이 여럿 있었다. 

도심 안의 보태니컬 가든을 걷는 일은 언제나 상쾌하다. 곳곳에 수백 년은 된 듯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았는데 구멍 난 뿌리가 드러난 모습이며 이끼가 낀 모습이며 반지의 제왕 속 배경을 닮은 듯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도 뉴질랜드의 자연과 역사를 잘 담은 옛 영화라 생각이 났다.  19세기를 배경으로 싱글맘 벙어리 여인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재혼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배를 타고 뉴질랜드로 이주해왔다가 이웃집 마오리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매우 슬프고 아름답다. 

가든은 그리 크지 않았고 아침 산책 삼아 한 바퀴 돌기 딱 좋았다. 시립 도서관을 열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그동안 못했던 인터넷도 잠시 쓸 겸 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공부를 할 듯한 아시안 학생들 몇몇과 노숙자인 듯한 마오리 사람들도 주변에서 서성였다. 10시가 되어 문이 열리자 모두들 도서관에 입장했는데 노숙자들은 재빨리 핸드폰을 충전시키며 그 옆에서 늘어져 다시 잠을 잘 태세다. 간밤에 서늘해서 잠을 못 잤는지 아늑한 도서관 코너를 익숙하게 점거했다. 관리자들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그들을 받아들인다. 오클랜드의 아침 풍경은 좀 스산한데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은 애매한 모습이다. 활기차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이 도시의 명물은 오클랜드 타워일 것이다. 타워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꼭대기 둘레를 걷기도 한다. 잠시 서서 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자 추억일 것이다. 지하철 공사를 하는 건지 주변 도로를 다 파헤치며 대대적인 공사를 해서 대단히 바쁜 것도 아닌데 번잡스러웠다.

기념품 가게나 작은 갤러리들을 들락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오클랜드도 대략 한 바퀴 돌게 된다. 16살 아들은 생애 처음으로 스타벅스에서 제 돈으로 커피를 사서 마셨다. 나도 잘 가지 않는 스타벅스에서 평소 안 마시는 크림이 잔뜩 들어간 냉커피를 한잔 얻어 마셨다. 여행 중이니 일상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배로 돌아왔다. 날이 흐려 우산을 챙겨 나갔는데 마지막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의무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했고 모두 배 안에서 마스크를 썼지만 (호주는 이미 1년 전부터 마스크를 해제했기 때문에 마스크를 다시 쓰는 생활은 좀 낯설었다.) 지난 며칠간 코로나가 번져가는 듯했다. 이와 관련한 공식적 뉴스는 없었지만 프로토콜이 한 단계 높아져 위생 관리 규칙이 엄격해졌고(자가 테스트, 식전 손 씻기 등) 격리 안내를 했으며 가끔 어떤 공간은 확진자가 지나갔는지 출입을 금지시키고 청소를 열심히 했다. 배 안이 알게 모르게 조용해져 갔다. 

그래서 혹시나 일정이 바뀌거나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지를 가볍게 고민했었는데, 오클랜드까지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멜번으로 돌아가는 남은 3일간 배안에서 놀고먹을 일만 남았다. 

한동안 조용했던 배 안의 여러 프로그램들이 다시 활기를 띄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느슨하게 즐겼다.


어느 날인가 선장의 갑작스런 안내방송이 있었다. 응급환자를 구조하기 위해 출동한 헬리콥터가 갑판에 내려올 예정이니 놀라지 말고 실내로 들어가라는 내용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중환자가 아닐까 혼자 짐작해 봤다. 노인들도 많고 그동안 방 안에서 격리하며 지냈던 감염자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안정적이었고 차분했다. 이미 백신을 맞은 자들이고 걸리면 격리하며 지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배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여행을 나선 것이 대단 하달 수도 있겠고, 예약을 하고 난 뒤 코로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되어 어쩔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환자 이송을 위해 지상에서 헬기가 날아왔고 크루즈가 잠시 방향을 틀기도 했다니 이 서비스와 시스템에 잠시 놀랐다.

시도 때도 없이 펼쳐지는 장관들. 이름도 알 수 없는 섬들이 다가왔다 멀어진다. 매일 해가 솟아오르고 바다 뒤로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고 별이 쏟아진다. 


간식에 야참 룸서비스까지 열심히 시켜 먹다 보니 여행도 끝나갔다. 머무르고 싶다고 내리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즐거웠던 크루즈, 아름다웠던 뉴질랜드에서의 시간도 이제는 마무리할 때고 나는 재충전이 되었다.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뉴질랜드 크루즈, 타우랑가 키위 농장은 이렇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