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기 Jul 11. 2023

호주, 세계에서 제일 멋진 '멜번 주립 도서관'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을 더 살면서 더 떠돌다가 더 멋진 도서관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도 내 인생 최고의 도서관으로 세계에서 제일 멋진 도서관으로 이곳 멜번, 스테이트 라이브러리를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아집 때문이 아니고, 내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첫인상을 주었고 많은 청춘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이 건물이 나이 먹거나 업그레이드하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고 내 아들도 지금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십 수년 전 멜버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순간이 기억난다. 웅장하고 큰 건물이었지만 낡고 오래된 곳이었다. 삐걱대는 가구들, 출입자의 사색이 담긴 또 그것을 이은 줄줄의 댓글들이 너무 심오해 화살표를 따라가며 다 읽던 침침했던 화장실의 철학적인 낙서들도 생각난다.

이 도서관의 백미는 열람실이었다. 라트로브 리딩룸. 그곳은 늘 어둡고 묵직했다. 돔 천장과 높은 벽에 뚫린 몇 개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전부였다. 극장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밖에서 막 들어오면 내부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머리카락 한올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분위기에 조용히 가까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보면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서서히 눈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높고 빽빽한 서가엔 고서들이 가득했고 낡고 딱딱한 의자는 건들대면서도 튼튼했다.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모를 최고 중앙석을 중심 삼아 사방으로 뻗은 긴 책상들. 자리 하나하나에 놓은 초록색 램프에선 따뜻한 오렌지 불빛이 쏟아졌다. 아아........ 세상엔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곳에서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던 사람들도 있었구나... 그런 생각들을 아찔하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워킹할러데이로 시답잖은 일들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뿌옇게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자연광, 그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들을 헤며 이젠 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홀로 흥분하고 자유로워하고 불안해했던 시간들... 

그때의 그 시간들은 어디론가 흘러버리고 그 사이 이 도서관도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했다. 1850년대에 도서관으로 처음 세워져 미술관이나 박물관등을 품에 안으며 조금씩 확장하다가 다시 이들을 독립시키며 살림을 따로 내어 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중간중간 개보수를 하며 지내다가 2000년대에 들어 2천억 원 이상의 세금을 투자해 수년에 걸쳐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벌인 뒤 몇 년 전 재개장했다.

도서관은 전체적으로 매우 현대적으로 변했다. 팔각 돔 열람실 바깥 복도는 갤러리가 되었다. 도서관 역사도 보여주고 소장한 희귀 고서들도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들을 보다가 창문이 나올 때마다 열람실을 내려다볼 수 있다. 층을 오를 때마다 열람실의 풍경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이 갤러리의 최고 작품은 그냥 이 열람실 자체인 것이다.

구조 설계 가구 역사 이곳을 드나들던 개개인의 사연들.... 그런 것들을 살피고 들춰보며 4,5층의 건물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다시 하나씩 내려온다.


열람실은 고서를 많이 치운 듯하고 돔도 뼈대만 남기고 싹 바꿨다. 새하얀 페인트는 밝고 환해 모든 것이 또렷하게 잘도 보인다. 다 좋은데 그래도 그냥 예전의 모습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은은히 코 끝에서 머물던 고서의 냄새, 평화롭고 아늑하던 늦은 오후의 햇살들이 아쉽다. 이제는 사라진 아름다웠던 옛날의 모습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지나간 시간들. 잃어버린 게 아닌데 지워져 버린 과거라니.


도서관 한쪽의 다른 갤러리. 기증자 이름을 붙인 곳인데 생각이 안 난다. 그곳을 지나면 또 다른 스터디룸이나 여러 기능의 방들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체스 관련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체스룸도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놀이방. 누구든 와서 놀다 가는 곳. 십 대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영화도 보고 어른 아이들이 책을 읽는 곳. 한가한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색칠놀이 하다가 뒹구는 곳. 시험에 찌들고 잠에 쫓긴 어린 학생들이 토플책에 머리를 박고 자는 곳이 아닌, 사사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 넣는 곳이 아닌, 삶과 예술이 있고 철학과 사색이 저절로 일어나는 도서관. 딱히 책을 파고들지 않아도 머리가 묵직해지고 가슴이 꽉 차오르며 가쁜 숨을 고르게 해주는 곳.

나는 노년에도 이곳을 찾아 젊은이들 사이에서 책장을 뒤적이고 싶다.(2012/07/16 씀)


지난주 아들의 방학을 맞아 멜번을 다녀오며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사진을 찍었다. 11학년인 아들과 시내의 대학 캠퍼스들을 둘러보던 길이었다. 어린이 코너 방석에 걸터앉아 책을 많이 읽던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이곳을 드나드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봤다. 

10여 년 전에 쓴 글을 찾아 읽어보니 25년 전 이곳을 처음 왔던 순간의 감상이 적혀있다. 기억나는 감정도 잊고 있던 감정도 되살아난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를 풍요롭게 해 주었고 살아있는 동안은 종종 별일 없이 드나들 친구 같은 고마운 도서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뉴질랜드 크루즈, 오클랜드와 마무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