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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Aug 24. 2023

파리, 몽마르트르 단상

불편하고 슬프다가 잠시 안락하기도.

열흘 묵을 적당한 가격의 파리 숙소를 찾으며 어느 지역이 좋을지 고심했다. 여러 낯선 이름을 검색하다 몽마르뜨를 보았을 때 너무 반가웠다. "나, 여기 알아. 너무 좋잖아. 이곳으로 하자."

15년 전 홀로 배낭여행하며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몽마르뜨 언덕을 올랐던 때가 떠올랐고, 그곳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숙소가 있다니 아침마다 부드러운 커피 냄새를 맡으며 잠을 깰 거라고 기대했다.   

파리의 기차역은 우울하고 사람들은 지쳐보인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경악을 했다.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을 떠날 땐 국제공항처럼 깔끔하고 근사한 터미널에서 기차를 탔는데, 불과 두어 시간 뒤 내린 파리의 역은 엉망진창이었다. 택시를 타려 줄을 서는데 택시조차 하나같이 낡고 더러웠다. 그 택시 안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지금 파리란 말인가? 어둠이 내리고 상점이 닫힌 거리들은 폭도들이 훑고 지나간 제3세계 어드매 같았다. 무질서한 스프레이 낙서로 뒤덮인 우중충한 건물들. 차도며 인도며 쓰레기는 나뒹굴고 곳곳에서 오물냄새가 풍겼다.  

해산물, 육류 샐러드등 애피타이저를 파는 가게. 종류도 다양한 가금류.
프랑스인들은 토끼고기를 좋아하나 보다. 그래도 정육점에 털부숭한 토끼를 진열해 놓을 줄이야. 털 벗고 만세 부르는 토끼들.
친절한 점원이 토끼 넓적다리 구이를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호기심 많은 나 조차도 도리도리. 먹음직스러운 아기 통돼지는 잘라팔지는 않는다 하여 통닭이나 돼지 갈비등을 사다 먹다.

그 끔찍한 분위기는 우리가 내릴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아파트 입구에서 숙소를 잘못 택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더럽고 가난한 것을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더한 곳에서도 난 살아봤고 살 수도 있다. 단지 난 여행 중이고 내가 파리를 선택했을 땐 이런 걸 기대하고 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고소한 빵 굽는 냄새와 감미로운 커피 향이 좁은 골목을 가득 매울 줄 알았는데, 전날밤 누군가가 갈긴 찌렁내와 찌든 담배냄새 따위로 고통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과일 야채 가게. 색깔도 모양도 다양한 베리류.

도착과 동시에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곳에 이미 방을 예약해 놨고 짧지도 않은 열흘을 파리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런 체념을 하며 하루 이틀 불안하게 떠돌다가 그래도 다시 여행의 의미를 찾은 곳도 결국은 몽마르뜨 거리였다.

'이 골목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 있다'라고 자신하던 레바논 출신 청년 에이전트의 말대로 이 골목엔 정말 별의별 가게가 다 있었고 별별 파리지앵과 거지와 이민자 난민자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밤늦도록 아니 새벽이 밝도록 생활소음이 끊이질 않아도, 가게에 가면 점원들이 낯선 우리 가족이 신기한지 말도 걸고 빨래방에 가면 시끄러운 여인네가 동전도 바꿔주며 슬쩍 미소를 주었던 덕에 나는 이 거리에서 상한 감정을 회복하며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매일 오가며 그들처럼 저녁메뉴를 궁리하고 장을 보던 것이 내가 파리에서 가장 즐겼던 3가지 중 하나가 되었다.(나머지 두 가지는 차차.)


파리지앵들은 퇴근길에 장을 본다. 그들을 따라 고깃집에서 고기를 사고 야채집에서 야채를 사고 빵집에서 빵을 사 거의 날마다 숙소에서 저녁을 차려 먹었다. 처음 보는 먹거리도 다양하게 많았고, 맛도 좋아 몇 날 며칠을 시장을 돌며 미식을 탐했다.   

재래시장은 인심도 좋아 6시 문 닫을 때쯤이면 세일도 했다. 이틀째부터는 얼굴도 기억하더니 단골취급을 하며 덤도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도 나름 훈훈하고 친절하구나 생각했다. 영어로 물으면 대꾸도 안 한다더니 그런 프랑스인은 더 이상 없었다. 안 되는 영어로 손짓발짓 해가며 혹은 종이에 글씨를 써가며 대답해 주었다.(물론 이 느낌이 항상 유지된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모르겠지만 대체로 익숙한 싱싱한 해물들.
빵집이 한 골목에 10개도 넘는 것 같다. 그런데도 퇴근길엔 가게 밖으로 길게 줄을 선다. 케잌, 디저트 가게.

파리의 카페는 낭만적이지 않다. 테이블은 너무 좁아 커피잔 두 개 올려놓기도 벅차고 옆테이블과의 간격도 너무 좁아 등을 바짝 맞대고 앉아야 할 뿐 아니라 좁은 인도의 반을 차지하고 테이블을 내어놓은 탓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행여 물컵이라도 건드리지 않을까 신경 써야 한다. 아이를 데리고는 차마 물 한잔 마실 엄두가 안나는 곳이다. 게다가 카페 모퉁이에는 종종 거지 모녀가 앉아 구걸을 하고 있고 (난 그들이 거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며칠을 그 앞을 지나다니다가 어느 날 그들 앞에 놓여있는 돈통을 봤을 땐..) 담배꽁초며 쓰레기며 오물 냄새가 엄청나다. 창가의 화분들은 말라붙어 죽어있다. 관리를 안 할 거면 갖다 버리던가.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민과 난민 정책의 실패로 도시가 너무 많이 망가졌다는 것,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파리가 심하게 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이며 에펠타워며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곳은 없었다. 물론 이건 열흘 여행하면서 본 게 전부인 나의 편협한 주관일 수도 있지만 스위스 사람들이 퇴근길에도 활기차 보였다면 파리시민들은 출근길에도 무너질 듯 지쳐 보였다.


저녁이라 생기가 도는 거리 풍경. 이 시장거리 끝에 우리의 아파트가 있었다. 파리의 진짜 마력은 아무리 별로라 해도 사진을 보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일게다.
새우와 허브를 넣은 잴리는 애피타이저로, 훈제연어와 베이컨을 감싸 구운 닭은 저녁으로. 쫄깃한 소세지는 다음날 간식, 먹다남은 통닭 가슴살은 빵 사이에 넣어 도시락으로.
오징어와 프랑스산 앏은 콩깍지를 잔뜩 넣은 소면 국수. 소면은 런던에서 이삿짐 꾸리던 이름모를 일본 유학생에게서  얻었다.

몽마르뜨의 아파트는 위치나 교통을 보고 선택했던 거고 내부는 좁았지만 깔끔하고 무난했다. 밤늦도록 시끄러웠고 가끔 아파트 입구에 흑인 청년들이 모여 앉아 있기도 한 주변환경들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조용히 눈을 깔고 길을 내주었는데도 왠지 신경이 쓰이니 나도 확실히 인종차별주의자인가? 백인이나 아시안 청년들이 앉아있어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장대비가 하루종일 내리던 어느 날, 베르사유 궁을 가기로 한 계획을 연기하고 집에서 짐정리하고 엽서 쓰고 여기저기서 들고 온 브로셔들을 읽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냉장고를 뒤져 국수 요리까지 해 먹으며 이 방이 내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단 생각이 갑자기 들어 감사했던 적도 있었다. 비 걱정 없이 온 가족이 뒹굴 수 있는 방 한 칸이 너무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골목에서 구걸을 하던 그 모녀는 어디에 있을까? 기념품을 강매하던 검은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도시의 이민자와 난민자도 결국은 이런 작은 쉼터 하나 찾는 것뿐인데.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비는 그쳤고 하루 종일 방안에 있던 우리는 어슬렁 동네 산책에 나섰다. 몽마르뜨 언덕길을 오르며 골목 풍경을 즐기고 저 멀리 에펠 타워가 반짝이는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동네 주민처럼 할 일 없이 두리번댔던 그 저녁의 기억도 썩 나쁘지는 않으니 여행의 감정이란 변덕스럽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것도 같다. (2013/10/16씀)



여행팁:

일주일 묵을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에서 장을 보아 냉장고부터 채웠다. 과일이나 주스, 우유, 아침으로 먹을 시리얼이나 빵, 아이가 먹을 간식 등등을 사고 나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지역 특산물이나 독특한 식재료들이 다양해 구경하며 장을 보는 재미가 있다. 

숙소를 고를 땐 작더라도 주방이 있는 곳을 골랐다. 미식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어릴 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때나 맘 편하게 먹는 것이 우선이라 여겨 도시락을 싸 피크닉을 많이 했다.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장봐도 레스토랑에서 사먹는 것보다 식비가 많이 절감된다. 

난 기본적으로 사먹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면도 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외식엔 내가 원하지 않는 첨가물들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저녁도 대부분 집에서 간단하게 먹었는데, 하루 전날 미리 요리해 두기를 추천한다. 쌀을 씻어 하루 동안 불려 두면 다음날 냄비로 밥을 짓기가 수월하다. 카레라도 한솥 끓여두면 다음날 귀가하자마자 바로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는 바로 잠자리에 드니 남은 시간에 샤워도 하고 그때부터 내일 먹을 요리도 설렁설렁하며 다음날 일정을 계획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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