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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Nov 14. 2022

런던, '창의력 교육'의 원천은 어디일까?

재미난 런던의 역사와 건축

런던을 여행하던 어느 날, 템즈 강변을 걷다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갤러리를 가게 됐다. 폐기된 화력 발전소 건물을 혁신적으로 개조해 만든 영국 최고의 현대미술관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     

난 이날 이곳에서 꽤 감동을 받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그것이 어떤 개개의 미술작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기억나는 작품도 별로 없고 전시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도 가물가물 하다. 그러나 예술이니 건축이니 이런 구분을 떠난 그냥 하나의 큰 덩어리로서의 공간으로 이 미술관은 크게 기억에 남는다.    

통로도 전시관도 전시 방식도 도서관도 카페도 새롭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틀을 벗어나 있었다.   

가령, 이곳은 아이들 놀이터가 아닌 일반 전시 공간이었다. 처음엔 여기저기 널린 블록을 보며 무슨 전위 작품인가 했는데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이 철퍼덕 바닥에 앉더니 그냥 아이들하고 블록을 쌓으며 노는 것이었다. 이러라고 만든 공간인가? 아들도 런던 여행을 기념하는 의미로 빅벤을 쌓아 올리는 작업을 한동안 했다.   

도서관은 동네 만화방처럼 친근하고 벽이 없는 느낌이었다. 의자며 박스며 폐타이어며 제멋대로의 낡은 카펫이며 '저런 건 어디서 주워 왔을까?'싶은 짝이 맞지 않는 것들이 편안하게 어우러져 기능을 다한다. 헌책을 쌓아 올려 천장에 매달았더니 샹들리에가 되었다. 허술한 듯 한 외관이지만 다양한 책들을 구비하고 여기저기 펼쳐놓아 아이고 어른이고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든다.

전시장을 나와 카페에 앉아본다. 한나절 내내 죽치고 앉아 멍 때리고 있어도 따분하지 않을 풍경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러고 있었다. 창 밖의 모든 사물들은 결국은 정지해 있거나 움직이거나 하는데 구름을 보다가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그 위를 지나가는 보트도 보다가 강물 위의 다리를 보고 그 뒤의 건물들도 하나씩 보고 그 사이에서 개미처럼 빨빨대는 사람까지 헤아리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만히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미술관 카페의 통유리 창문은.    


이 미술관의 매력은 이런 것들에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보느라, 무엇을 생각하느라 자꾸만 발걸음은 늦추어지고 흐르는 시간을 잊는다. 그리고는 어느 지점에선가 그냥 멈춰서 엉뚱한 무언가를 주물럭 거리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빨래집게 안경테 종이 가위... 아이들은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낸다. '평범을 비범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미술관 어린이 코너에서 던지는 저 질문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것은 엄청난 재능이나 특화된 교육 과감한 투자.. 뭐 이런 것이라기보다 경계 없고 규정짓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 인간을 그냥 가만히 놔두는 여유에서 비롯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봤다.          

런던은 붐비는 도시였지만 어디를 가나 작은 놀이공간이 숨통을 틔우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 템즈 강가의 모래밭에선 아이고 어른이고 맨발로 모래장난을 하며 긴장을 풀고 재미있게 논다. 미술관과 일상이 경계 없이 이어지는 도시 한 복판의 시간과 공간이 아름다웠다. (2013/10/17 씀)



에놀라 홈즈'를 보다가 '테이트 모던'을 떠올림


'넷플렉스에서 세계 1위라는 '에놀라 홈즈 2' 영화를 봤다. 명탐정 셜록 홈스의 당차고 똘똘한 여동생이 1800년대 런던에서 오빠처럼 추리 사무실을 차리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내용이다. 재미난 오락영화이고 시대 배경 등 볼거리도 많은데 영화를 보면서 내 사색의 나래는 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여성이나 노동자의 권리가 비루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어린 처자가 개인사업을 열었고, 사건을 의뢰하는 이들은 성냥 공장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인데 파업을 하며 권익을 찾은 실제 역사를 영화 속에서 흥미롭게 연결시켜 다루고 있었다. 

'성냥공장 소녀들의 파업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역사상 첫 노동 투쟁이었으며 하나의 작은 불씨로 커다란 불길을 이끌었다'는 자막과 함께 마지막 장면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서는데 그 건물이 바로 이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아니던가! 도시 폐건물 재생 프로젝트의 유행을 이끌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그곳, 폐기된 화력 발전소를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더니 그 이전엔 성냥 공장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건가?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결국 이 영화는 영국이 자랑할 만한 모든 문화와 역사를 잘 버무려 적절하게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 BTS가 한복을 입고 고궁에서 뮤직 비디오를 작업하며 한국문화를 총체적으로 전파하는 것처럼.

영화를 다 본 뒤 추억에 잠겨 10년 전 여행했던 그곳을 더듬어 봤다. 오늘을 살며 작은 계기들로 인하여 추억을 업데이트하고 그때 했던 작은 생각들에 살을 덧붙여가며 생각을 넓혀가는 일도 여행이란 씨앗에서 해를 거듭하며 얻는 지속적 수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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