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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Oct 20. 2023

호주, 전쟁용사의 날에 했던 생각들.

RSL클럽에서 역사와 미래를 고민했다.

4월 25일은 앤잭데이(Anzac Day), 호주의 국경일이다. 1915년 터기 갈리폴리 전투에서 희생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을 추모하는 날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전쟁이 추가되어 지금은 전쟁 용사의 날쯤으로 해석이 된다. RSL (Returned & Services League 재향 군인회-전쟁 용사와 가족을 지원하는 클럽)의 주관 아래 전국의 크고 작은 마을에서 추모식이 열리고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나도 지난 10여 년간 마을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 꾸준히 참석을 해왔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석을 하고 아들 학교에서도 단체로 참석을 하니 빠지기도 어려웠다. 이곳에서 해봤던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눠보자. 


스킵튼 주민들과 학생들이 참가한 퍼레이드와 추모식. 맨 앞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장갑차를 타고 있다. 마을 광장에 있는 전쟁 기념비 앞. 구세군 브라스밴드의 앤잭 레퀴엠 연주에 맞춰 마을 여러 단체장들이 헌화했다. 언제 들어도 슬프다. 이 작은 시골마을에도 한국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젊은이가 있었다니. 

초등학생들이 마을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직접 지은 감사의 시를 낭송. 마을 전주민이 500명쯤인데 마을회관에 150여 명이 모였다. 모임이 끝나면 한 접시씩 들고 온 음식을 가운데 놓고 나눠 먹는다. 민간인들이 전쟁통의 군인들에게 구워 보냈다는 앤잭 비스킷은 꼭 먹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평화롭게 산다네. 이 얼마나 축복인가. 뭐 이런 얘기들을 한다. 모임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집에 모여 뒤풀이 앤잭파티를 한다.


1.   시민의 힘 


이런 행사가 중앙 집권적으로 열리는 것뿐 아니라 작은 마을 단위로 전국에서 벌어진다. RSL이란 민간단체는 호주 전역에 지부가 1500여 개가 있고 멤버만 2십만 명이 넘는다. 스킵튼에도 지부가 하나 있는데, 평소엔 시골 노인네들이 5-6 모여 노닥거리는 정도이다. 그러나 때만 되면 결집력 있게 모여 중앙지부와 의논하여 이런 행사를 빈틈없이 치러낸다. 


호주에 살면서 놀라는 건 시민의 힘이다. 적십자 라이온스 로터리등의 봉사클럽들, 가든 클럽이니 사진 클럽 같은 작은 취미 모임들도 그렇고 때로는 동네 스포츠팀, 학교의 학부모 모임, 혹은 환경 등 시민운동 단체 등이 매우 많은데, 평범한 소시민 몇몇이 동네마다 점 조직을 이루고 있다가 체계적으로 전국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상상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행사도 자발적으로 뚝딱 치러낸다.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 구석을 든든히 받치고 있다. 


가령, 엄마들이 몇몇 모여 학교 기금 마련 행사를 할 때도 보면, 어쩌다 한 번씩 만나 짧게 회의만 하고 흩어지는데도, 기획력 추진력 로비력(지역 정치가들을 만나 예산도 받아내고), 업무 분담에 따른 책임감 효율성 투명성 원리원칙 등등을 철저히 따져가며 일하는 게 놀라워 이들이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무슨 소수 정예 인재만 선발해서 모아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호주인은 왜 회의에 열심일까?' 아랫글 참조) 


내 지역 내 나라의 일은 내가 관리한다는 주인 의식이 투철한데, 그들이 딱히 똑똑하거나 도덕적이어서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시민의 의무와 권한에 대한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구구단도 못 외우는 아이들이 함께 모여 노숙자들을 위한 기금마련 행사를 한 텀(대략 10주)에 걸쳐 토론하며 기획하고 있는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수학 사회 과목과 통합 연계되어 있다. 


한국은 유치원 때부터 잔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집중하고, 공동체에 대한 실질적 관심보다는 시험이나 잘 보라는 식의 교육을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오도록 이웃과 사회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다수이고, 사건이 터지면 너나없이 대책 없는 분노를 쏟아낸다. 이들이 생각하는 사회참여는 촛불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다. 


2.   참 교육 


이날은 공휴일이지만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지역 행사에 참여하도록 권장을 했다. 나도 아침 일찍 아들 손을 잡고 퍼레이드에 참가해 학교 교문 앞에서 마을회관까지 2백 미터 남짓 걸었다. 이 짧은 시간을 통해 마을에 몇몇 있는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만났고 기념비 앞에 직접 헌화하고 다 같이 묵념하면서 전쟁이 무엇인지, 전쟁용사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는 것이다. 전쟁 기념비 앞에서 헌화식이 끝나면, 모두들 마을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기념식을 진행한다. 

핵심은 초대 강사의 강연인데, 어떤 해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2차 대전 참전용사가 전쟁의 참상과 그 시대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얘기하기도 하고, 어떤 해는 최근의 전투였던 아프가니스탄 참전자의 경험담을 듣기도 하고, 또 어떤 해는 해군 장교쯤이 나서서 요즘 군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해 주는 등등의 전쟁이나 군대를 주제로 한다. 누렇게 변한 책자나 훈장을 들고 오기도 하고, 역사를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보기도 하고,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이도 있다. 동네 꼬마들, 농부들, 백발의 할머니 등등 민간인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군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전쟁에 관한 교육을 떠올려보면, ‘때려잡자 공산당’ ‘미친개는 몽둥이뿐’ 같은 폭력적이고 선동적이며 감정을 들끓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대가 역사가 그랬다지만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작금의 한국인들이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이유는 그런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수한 전쟁용사들이나 전역한 이들은 군대 이야기를 평생 술자리 안주로 삼으면서도, 그 세상을 모르는 민간인(여자나 아이들, 노인들) 들과 이성적으로 소통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니들이 알게 뭐냐’며 선을 긋거나 ‘국가기밀이다’며 그 썩는 사정을 은폐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회와 역사를 놓고 볼 때 전쟁과 국방은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람보식 영웅담처럼 떠들거나, 같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임에도 낮은 지위에 있는 사회복무요원이나 여군들을 비웃는 등의 냉소적 문화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6.25 기념일에 전국의 학교나 모든 기관이 (중앙 정부에서 진행하고 티브이로 방송만 하는 것 말고) 최소 단위로 (학교의 경우 각 반마다) 모여, 강사를 초대하여 (학부모 봉사자 혹은 조부모) 군대에서 했던 훈련이나 힘들었던 일을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들려주거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전쟁, 평화는 왜 중요한지, 할머니를 초대해 그 당시 얼마나 먹고살기 어려웠던가를 얘기하면서 꿀꿀이죽을 끓여 먹어 본다든지 하는 것이다. 따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훨씬 잘 이해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봤다. 보수니 종북이니 쓸데없는 논쟁은 사라지고, 통일 대박은 이런 교육을 전제로 해야만 일어나지 않을까!



3.   기억의 힘 


앤잭 데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다. ‘Lest We Forget. 잊지 말자.’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없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 전쟁을 줄이는 방법은 한 가지. 역사를 기억하고 배우자는 것. 

호주엔 전국 곳곳에 거의 마을 단위로 전쟁 기념비가 있다. 저 멀리 태즈메이니아 섬 땅끝 마을에 가도 그렇다. (한국은 주로 용산 전쟁 기념관이나 국립묘지에 가야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전쟁 기념비엔 한국전쟁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한국 전쟁 기념비가 한국보다 호주에 더 많이 있을 거라 추정해 본다.) 그래서인지 호주사람들은 아직도 한국전쟁 이야기를 참 많이 한다. 한국에 살 땐 생각해 보지도 느껴보지도 않았던 그 전쟁 얘기를 자꾸만 물어서 예전엔 참으로 난감했다. 난 세대가 다르다고, 전쟁을 겪지 않아 기억도 없고 모른다고 대답했었다. 왜 자꾸 나와 상관없는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지 답답했다. 한편으론 당신들이 치른 전쟁의 피해와 아픔은 한국보다 훨씬 덜할 텐데, 왜 이리 수선이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여러 해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내가 정말 몰랐던 건 전쟁이 아니고 평화였다는 것을 요즘에 인식한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전히 임해야, 지나간 전쟁을 마음 편히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전쟁 중엔 전쟁을 추억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는 어쩌면 전쟁의 후유증이고 그 트라우마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채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그 혼란과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는 과정 없이 그냥 덮어놓고 살아와서 생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맨 정신으로 전쟁을 말할 수 없고, 인명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질 뿐이고, 시민들이 사회 깊숙이 있는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지속적으로 다룰 여유가 없고, 나 이외의 이웃을 세심히 챙기지 못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전쟁과 불안정을 이제는 끝내자는 여러 제안이 나오는데, 그 모든 것들이 대통령이나 정치가들이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교양서적 몇 권 읽는다고 시민정신이 하루아침에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미래 세대가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도록 철저히 교육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한 세대쯤 후의 한국사회는 진정 두 다리 뻗고 평화롭게 옛날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많았던 앤젝데이였다. (2014/05/02씀)




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도 앤잭데이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새벽 6시, 12시 두 번에 걸쳐 기념식을 여는데 이른 새벽에도 비가 와도 수백 명이 자발적으로 모인다. 

기념식이 열리는 RSL회관 앞은 교통을 통제한 도로라 아이들을 배려하는 시설이 전혀 없는데도 온 가족이 기념식에 참가한다. 온몸에 문신을 한 아빠가 딸아이를 무등태우고 유모차를 끌고 온다. 아이들은 뙤약볕 아래서 무엇을 보고 배울까.


https://brunch.co.kr/@dreamdangee/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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