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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라위'-20년간 후원한 학교를 찾는다는 건

한국 미션스쿨도 이랬던 걸까?

by 몽기

선교여행의 나날들은 늘 무언가로 꽉 채워졌다. 계획표에 나열된 일정부터 현장에서 갑자기 잡히고 변동되는 일이나 여러 곳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공식 비공식적으로 만나는 일들이 많았다. 지난 20여 년간 호주 장로회와 말라위의 장로교단이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여러 사역을 함께 해왔기에 리더나 멤버들도 공적 사적으로 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역 중에 몇 개의 학교 탐방은 특히나 기대되는 일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오부스 미션 스쿨


20여 년 전 호주의 어느 선교사는 오갈 데 없는 주변의 고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라위 제2의 도시 블렌타야 교외에 약간의 땅을 샀다. 먼지 풀풀 나는 황무지에 아이들이 생활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밭을 갈아 아이들이 먹을 채소를 키웠고 닭을 키워 계란도 얻고 시장에 내다 팔아 작은 수익도 얻었다.

멜번에 있던 우리는 종종 기도 편지를 받으며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고 작은 헌금을 모아 후원해 왔다. 새로 건물을 지어 시설을 확장하거나 교육 시설로서 체계를 세워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는 등 감사한 뉴스도 있었고 어렵게 사모은 건축자재를 도둑맞아 털리거나 선교사가 암을 얻어 생사를 오가는 등 힘든 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마음 한켠에 두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감히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문 전에야 깨달았다. 도대체 학교에 가서 무얼 하지? 아이들과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며 여러 생각들을 하는데 모퉁이를 돌자 언덕 저 멀리 나무 밑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묘한 순간이었다. '헉! 저 아이들이구나!'란 생각이 듦과 동시에 모든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호기심으로 한 발짝씩 멋쩍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교정 텃밭에서 키우는 야채와 미니 양계장. 아이들 식사에 쓰이는 중요한 식재료이자 학교 운영에 필요한 부수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학교 시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열악했다. 책걸상이 부족해 바닥에서 수업을 하고 교과서나 연필은 사치였다. 칠판이 있으면 다행이고 벽에 적힌 몇 가지 노트들이 교재였다. 문짝은 너덜대고 그 흔한 놀이터 하나 없는 운동장 바닥은 잡초와 불쑥 솟은 돌덩이들로 거칠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반마다 백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꽉꽉 찼고 교직원들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시설을 소개했다.
교정 한쪽에서 가구를 손수 제작하는 목수.
급식을 요리하는 야외 주방. 장작을 태우고 큰 솥에 무언가를 끓인다. 시설이 열악하니 노동은 고되고 더디다.

시설을 꼼꼼히 돌아보고 건축 중인 새 건물도 살펴보고 운동장에서 임시 조회를 열었다. 작은 예배를 함께 드리고 선물도 전달했다. 도서관에서 읽을 책들, 학용품들, 유카릴리 악기들.. 무겁게 챙겨 왔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선택받은 축이란다.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공립학교 수업료(1년에 5천 원, 법정 최저 임금은 월 9만 원 정도지만 그 이하로 받는 노동자가 태반이다.)의 40배를 감당할 만한 가정에서 오는 아이들이란다. 예전엔 아기 동생을 등에 업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맨발로 오는 아이들도 많았단다. 사회가 그새 발전한 것이기도 하고 진짜 어려운 아이들은 넘보기 어려운 학교가 된 것도 이유였다. 외부에서 오는 후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려니 수업료를 받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가난한 아이들은 오지 못하는 사립학교가 되었다.

20년간 기도하고 지원한 결과가 이거라니 뿌듯하기도 측은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며칠 뒤, 어느 공립학교를 갔더니 수준이 더 열악했다.
번듯한 칠판도 창문도 책상도 아예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두어 시간을 달려 깊은 산속에 있는 니노 미션 여고를 탐방했다. 그동안 들렀던 학교 중엔 최고의 시설이었다. 아마도 며칠 사이 말라위 학교 수준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교장실과 교무실. 형광등이 딱 하나라 대낮에도 어둑했다. 그래도 복사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이 급했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안내한 야외 화장실은 처참했다. 다시 달려 나올 수도 없고. 여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는 전쟁통의 포로수용소만도 못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평화로웠다. 학교 생활이 즐겁냐는 질문에 '기숙사도 있고 밥도 맛있게 잘 나오고 친구가 있어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 년째 가뭄이 이어지고 사회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빠져 학생 수가 줄었단다. 돈이 부족해 자녀를 이곳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은 또 밖에서 발을 동동대는 것이다.

새로 지은 강당은 훌륭했고 학생들은 수수하고 밝았다. 어느 학생이 자작곡 랩으로 우리를 환영했다.
과학실과 선생님. 난장판이었지만 이 정도의 교구가 어질러져 있는 것을 처음 봤다.
이곳에서도 텃밭은 중요했다. 식량이 귀하니 학교마다 자급자족에 애를 쓰는 것이다. 바나나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급식소. 아궁이가 현대적 시설로 인식되는 듯 했다. 땔감은 여전히 밖에서 집어넣지만.
수백명의 식사를 이렇게 준비하려면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나.
밥을 먹고나면 각자의 식기를 펌프물로 설겆이 한다. 우리도 교직원들과 점심을 꽤 푸짐하게 같이 먹었다.

점심 초대를 받고 교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동안 익숙지 않은 환경과 물조심을 하느라 음식도 가려먹고 누군가의 식탁에 둘러앉아도 챙겨 온 간단한 도시락(과일이나 숙소 조식에서 챙겨 온 삶은 계란 따위)을 따로 먹곤 했는데 이 즈음부터 긴장이 좀 풀렸고 같이 먹었다. 따뜻한 음식이었다. (먹는 얘기는 다음에 해보겠다.)

포로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여고생 기숙사.
한방에 14개의 침대만 가득. 옷과 책이 없으니 옷장도 책장도 필요없다.;;
그래도 도서관에 모여 '성경을 어떻게 읽을까'란 주제로 열심히 공부하는 소녀들의 진지함이 좋았다.

말라위를 여행하고 학교를 돌아보면서 수시로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한국의 과거 어드메로 시간 여행을 떠나곤 했다. 100여 년 전 서방의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을 딛고 학교나 병원을 세웠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같은. 이화여고나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시작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렇게 오래도 아니다. 50대 후반인 내가 그러니까 70년대 후반 광화문 한복판의 명문 초등학교를 다닐 때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다. 겨울이면 조개탄이나 땔감을 날아와 교실 난로에서 태웠다. 지난 1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들과 그 학교를 방문했었다. 3천 명에 달하는 전교생들이 모여 운동회를 하던 운동장이 손바닥만 해 깜짝 놀랐다. 학생들로 미어터지던 그 학교는 이제 학생수 미달로 몇 번째 폐교를 논의하고 있다. 내가 아련하게 혹은 낭만적으로 기억하는 추억 속의 가난들이 어쩌면 이런 처참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6.25 때 이디오피아 군인들이 참 멀리서도 와 참전을 했고 60년대 GDP는 가나와 비슷했다고도 한다. 전쟁 중에 건물이 없어 천막 학교를 다녔다든지 미군만 보면 달려들어 초콜렛을 구걸하던 아이들이 많았다든지 하던 어디선가 들었던 옛날이야기들이 눈앞에서 날것으로 펼쳐지니 기분이 이상한 것이다.

한국은 그 비숫한 출발점에서 대단하게도 눈부신 발전을 한 것이고 말라위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주 조금 달라졌다.


가난에서 벗어난 한국의 역사가 기적이듯이 내가 뿌리는 작은 씨앗이 이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뭐라도 되면 좋겠다. 이 아이들도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고 꿈꾸며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대와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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