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을 보다가.
얼마 전 ‘내조의 여왕’을 재미있게 보았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한국 드라마를 굳이 찾아보는 이유는 감정적 정서적으로 더 많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왜 저럴까’ ‘아직도 저러나?’라는 의문이 생기는 독특한 한국 문화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직장인의 ‘회식’이다. ‘내조..’에서도 직장인의 회식 술자리는 참으로 자주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있고 (미리 협의하에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또 술을 취하도록 마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직장일의 연장이라고 우기고 부인들도 사회적으로도 그 우김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과연 그럴까?
호주 직장인들은 어떻게 회식을 하는가? 내 경험을 토대로 호주 회식 문화를 짚어보겠다.
수년 전 호주 회사에서 3년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일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식의 회식, 즉 전 직원이 근무시간을 끝내고 특정 장소로 옮겨 회사 돈 혹은 상사 돈으로 밥이나 술을 먹은 경우는 두어 번에 지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1년에 딱 한번, 12월 초에 ‘크리스마스 파티’ 혹은 ‘브레이크 업 파티’로 불리는 회식을 했다.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망년회 송년회쯤이 될 것이다. 제법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와인 몇 병을 곁들여 내내 수다 떨며 저녁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회사 분위기가 썰렁하거나 삭막하지는 않았다. 당시 직원들의 국적이 매우 다양했는데, 3개월에 한 번씩 사무실에서 ‘다문화 점심(multicultural luncheon)’을 먹었다. 직원들이 자기 나라 음식을 한 접시씩 해와 회의실에서 뷔페식으로 나눠 먹는 것이다. 평소엔 도시락을 싸와 30분 안에 각자 먹어 치우고 자기 일로 돌아가던 직원들도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편인 데다, 호주는 월급이 아닌 시급으로 계산해서 급료를 받기 때문에 가능하면 점심을 짧게 먹고 일찍 퇴근하는 걸 선호한다.) 이날 만큼은 느긋하게 자리 잡고 대화도 진득이 한다. 그래 봐야 한 시간을 넘기지는 않지만. 점심식사가 끝나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돌아가면서 뒷정리를 하는데, (주로 빈 그릇을 사무실 한쪽에 있는 식기세척기에 정리해 넣는 것) 당시 우리 사무실의 최고 지위자였던 매니저 (런던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었음에도)도 한 번씩 자기 차례를 담당했다. 굳이 따지자면 경력으로나 연령으로나 내가 막내급이었는데, 내 업무(Job Criteria)엔 식기 정리가 없었고 아무도 나에게 암묵적으로 미루지도 않았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생일 파티도 했다. 평소 직원들이 적은 돈을 갹출해서 모았다가 생일자에게 케이크와 작은 선물(10불-만원 정도 하는)을 마련해 주었는데, 앞서 말한 30분간의 점심식사 중에 이런 축하가 전달된다. 생일 노래도 부르고 촛불도 끄고 케이크도 나눠 먹고… 그리고는 바로 자리로 돌아가서 일한다. 내가 받았던 생일 선물은 월간 골프 잡지였다. 사소한 선물이지만 주말마다 골프 레슨을 받고 있었던 것을 동료들이 기억한 것이다. 개인적인 분위기는 있었지만 나름 훈훈했고 동료애도 있었다. 직원들 간의 업무협조도 원만했다.
물론, 호주 회사가 다 이렇지는 않고 다른 회식 문화가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의 분위기가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또 다른 예로, 내 남편 전 직장의 회식 경험을 들춰보겠다. 남편은 회식으로 집에 늦게 들어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회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 회사도 일 년에 딱 한번 12월 즈음에 회식을 했는데, 내가 거길 쫓아갔다. 직장 근처의 레스토랑이었는데, 배우자(남편이나 아내), 파트너(동거 중인 커플-애를 서넛씩 낳고 10년을 넘게 한집에서 살아도 결혼을 안 하면 파트너로 불린다.) 혹은 커플 친구 (이성이건 동성이건-놀랍게도 한 커플은 레즈비언이었다.)를 동반해도 좋다고 해서 나도 아내의 자격으로 갔다. 밥 먹고 얘기하다가 맨 정신에 집에 왔다.
몇몇 사람들이 자기가 마실 맥주나 와인을 개인적으로 챙겨 왔다. 호주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BYO (Bring your own)를 허락하는데, 자기가 마실 주류를 외부에서 들고 오는 거다. 취향에 맞는 주류를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레스토랑엔 코르트 가격(와인 뚜껑 따는 비용으로 해석할까-얼음이나 와인잔을 빌리는 가격) 정도만 따로 지불하면 된다.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휴대용 아이스백에 냉장해 와서 즐기기도 한다. 처음엔 다 같이 모였음에도 제각기 다른 술을 가져와 따로 마시는 게 참 흥미로왔는데, 가끔씩 상대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그리 냉랭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 잔을 돌려가며 단합을 외치고 팀워크를 위해 폭탄주를 강요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다.
남편 직장 상사들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왜냐하면 난 부하의 아내이기 이전에 ‘레이디’였고 '게스트'였기 때문이다. ‘레이디 퍼스트!!’ 난 김남주처럼 남편 상사나 그 와이프에게 아부 떨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밥 먹자고 모였으니 밥이나 먹으면 되는 거다. 이 편한 세상~~!!
또, 어떤 해인가는 1년에 한 번뿐인 그 회식을 회사 안에서 하기도 했다. 사무실 한쪽에 출장뷔페로 음식을 차렸고, 가족을 동반해도 좋다고 했단다. 돌 넘긴 아기를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아 들쳐 업고 갔다. 다른 한 두 직원도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 동료들도 내게 다가와 육아에 대한 수다를 끝도 없이 풀었다. 자기들도 퇴근하면 애 보는 게 일이라 할 말이 너무 많은 거다.
여기까지가 내가 겪은 호주의 회식 문화다. 간간히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봤지만 술 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차, 3차란 단어나 개념조차 없다. 상사들의 권위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를 보면서 서글펐다. 세상은 넓고 다른데 우물 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진을 빼는 모습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장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는 전쟁이라 하니 한국 사회 구조가 참으로 처량하다.
한국 직장인들의 회식의 목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록 한국에서 수년간의 사회생활 중 무수한 회식을 했고 얼마간의 좋은 추억이 있을지언정… 한국의 회식문화도 이젠 바뀌어야 한다.
(2009/04/20씀)
한국도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또 살펴보면 젊은 세대들은 여전히 회식이 싫다고 외친다. 내가 20여 년 전 한국을 떠날 때도 이런 얘기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똑같은 얘기를 하다니.. 한국은 매우 빨리 변하는 것도 같지만 때로는 놀라울 만큼 느리게 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