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열다섯 살 가을이는 밤마다 줄넘기를 한다. 저녁도 일찌감치 먹고 숙제를 하다가 매일 밤 10시에 줄넘기를 하러 나간 지는 지난여름부터니 석 달쯤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제 의지로 꾸준히 줄넘기를 하러 매일매일 하니 대견하다. 물론 여기서,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이라는 엄마의 속마음도 잠시 비집고 나온다.
가끔은 여름이와 같이 줄넘기를 하러 나가고, 가끔은 나랑 나온다. 오늘은 나랑 나왔다. 가을이는 봄이나 여름이와 달리 나에게 뭘 해달라거나걱정과 고민을 나눈다거나 하는 횟수가 적다. 아마 한참 묵혀둔 마음일 거다.
"엄마, 다음에는 국물 떡볶이 해주면 안 돼요?" "엄마, 나 옷이 다 작아져서 맞는 티셔츠가 없는데 티셔츠 몇 개 사주면 안 돼요?"라고 얘기하는 편이다. 그럴 땐 혹시 가을이가 셋째라 내 눈치를 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도 가을이 눈치를 본다.
유일하게 가을이만 외탁을 하였는데 특히 우리 엄마를 닮았다. 남편은 가끔 우스갯소리로 장모님이라고 부른다. 그럼 가을이는 "박서방, 술 좀 그만 마시게나." 하며 아빠의 장난을 받아주곤 했다. 과거형 시제다. 현재는 안 받아쳐주고 아빠의 장난에 냉담하게 반응한다. 그런 가을이를 보면 남편에 대한 나의 반응과 비슷해서 놀란다.
힘든 속내를 잘 얘기하지 않고, 참다가 정말 필요하면 얘기하고, 그냥 혼자 스스로 알아서 하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별 신경 쓰지 않는 점들이 그러하다.
내 자식이 나를 닮으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고, 더 이뻐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야무지지 않았으니 내 자식은 좀 더 야무졌으면 했는데, 아이가 나와 겹쳐 보일 때 짠한 생각도 들고 반대로 그 지점에서 화가 날 때도 있다. 아이에게 나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가을이는 한쪽 공터에서 줄넘기를 하고 나는 주변 산책로를 빙빙 돌며 걷는다. 오늘은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 걸어본다. 가을이의 타닥타닥 거리는 줄넘기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풀벌레 소리와 아파트 단지 주변을 지나가는 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걸었다.
등산로에서 한 번쯤 만나는 아저씨들처럼 뒷짐을 지고 걸으니 허리도 꼿꼿해지고 양어깨도 뒤로 펴지고 몸의 정렬이 바르게 된 기분이다. 남이 하는 걸 보는 것과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은 다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나 심히 힘든 일일 때도 있고, 저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데 막상 해보면 이득을 얻을 때도 있다.
한참 산책로를 빙빙 돌며 걷다가 놀이터 쪽으로 들어가니 그네가 보였다. 밤에 오니 아무도 없어서 그네에 슬쩍 앉아 발을 굴러봤다. 발돋움을 살짝 했을 뿐인데 순간 몸이 앞으로 슈웅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밤바람을 온몸으로 다 맞는 기분이다. 놀이 기구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아 무서워서 못 타는데 오랜만에 그네를 탔더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처럼. 심장이 아찔한 진자운동을 하듯이.
사람들이 일부러 돈을 주고 놀이 기구를 타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이런 이유였을까. 산책로 몇 바퀴 돌았을 때는 못 느꼈는데 그네를 타자 심장이 가볍게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네를 높이높이 타다가 멀리 뛰어내리는 놀이도 하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이렇게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일이 잘 안 생긴다. 놀이 기구는 못 타니까 가끔 그네라도 타서 인위적으로 심장이 살아있음을 느끼게해 줘야겠다.
어쩌면 열다섯 살 가을이의 줄넘기도 심장을 살리는 일이었을까.자신을넘어서는일에 두려워하지 않는 가을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