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백장] 100-38
오늘은 '사람'을 키워드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아마도 나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터이다. 그런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세월을 거슬러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 장면 1. 아이들이 모여 헝가레를 치고 있다. 내 몸은 어느새 둥실둥실 떠오른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나는 그만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한동안 나는 교생실습 제자들이 선물해 준 여고 교복과 이름표를 고이 간직했었다. 교육학을 암기하면서, 괜히 교직 이수를 선택했나 후회했던 나였다. 그런데 이 순간의 설렘으로 나는 임용고시를 봤던 것 같다. 참 순수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잘 살고 있을까.
#장면 2. 흰 지팡이를 짚은 행렬 속 한 여학생이 내 팔꿈치를 잡고 걷고 있다.
"혹시, 언제부터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눈에 공을 맞았어요. 생각보다 저처럼 사고나 당뇨 같은 질환으로, 잘 보이다가 맹인 되시는 분 많아요."
나는 마음이 먹먹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사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생을 더 살아낸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장면 3. 미혼모 시설에서 외부 활동으로 놀이동산에 갔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지만, 자신이 키우겠다는 용기 있는 아이들이다.
"다녀올게요!"
K가 바람처럼 뛰어간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을까. 졸지에 남겨진 나와 봉사자들은 기저귀도 갈아주고, 각자 아이들을 안고 동물원 우리 앞을 서성였다. 벌써 십 년 전이니, K의 아들은 지금 초등학교 고학년이겠구나.
그저 내가 누군가에게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기쁘던 때가 있었다. 시각 장애인 활동 보조, 독거 어르신 말벗, 경로식당 보조, 제빵 기부, 연탄배달 등 나는 기회가 닿는 족족 몸을 움직였다. 돈이 없든, 나이가 들어 외롭든, 몸이 성치 않든. 각양각색의 괴로움을 겪는 이에게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나저나 헌혈 문자가 계속 오는데, 가야지 하면서 차일피일하고 있다.
#장면 4. 미술치료사 실습 시간이었다.
"다 그리셨으면 옆자리 짝꿍과 함께 의견을 나눠보세요."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뒷모습에 머리는 산발인 그림이었다.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보통은 뒷모습을 잘 그리지 않는다. 이런 내 모습을 들킨 걸까. 짝꿍이 부연 설명을 한다.
"놀라셨으면 죄송해요. 제가 실은 예전에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 제가 저를 치료해 보고 싶어서 이 과정 듣게 됐어요."
솔직함에 놀랐다. 용기 있는 그녀가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가만, 내가 이런 용기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맞다. 빅판 아저씨. 십 년 전 나는 노숙인의 자립을 돕는 빅 이슈 판매 지원활동을 했었다. 별건 아니고, 지하철에서 빅판 아저씨와 함께 "빅 이슈 사세요"라고 몇 시간 동안 함께 외치는 거다. 처음에 모기만 한 소리를 내뱉었는데, 빅판 아저씨의 우레와 같은 소리에 깜짝 놀랐었지. 어쩌면 용기란 '그냥 난 이렇다'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