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백장] 100-47
'whatever it takes'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뜻으로, 어벤저스 시리즈 '엔드게임'에 나왔던 문구이다. '인피니티 워' 이후 사라져 버린 인류의 절반을 되살릴 수 있다면, 어벤저스 주인공들은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2012년 유럽의 재정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유럽중앙은행 총재였던 마리오 드라기가 했던 유명한 연설문의 첫 부분이기도 하다.
참 멋지고도, 무서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whatever it takes'가 있었던가. 한때는 원하는 대학에만 가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엉덩이가 무거운 노력형 학생이었던지라, 꽤 오랜 시간을 책상과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원했던 대학은 아니지만, 같은 지역의 옆 학교에 합격했다. 내가 공부 머리가 없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아쉬웠지만 나는 그럭저럭 결과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이건 'whatever it takes'가 아닌 것 같다.
다음 후보는 '스노보드'이다. 왜 스노보드를 선택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상부터 지상까지 한 번에 활주해 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의 나는 여기에 꽤 공을 들였던 것 같다. 동호회 카페에 가입한 후 '초보자 보드 구입 도와주세요'라고 덜컥 글부터 썼다. 보드를 타지도 못하면서 처음 본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백만 원 상당의 거금을 주고 보드 세트를 구입했다. 시즌권을 끊고 평일 퇴근 땡 보드를 탔다. 두 계절 동안은 시즌방 생활도 해봤다. 무수히 넘어졌다. 겁이 나서 파이프는 못 타봤지만, 바랬던 대로 활주는 잘하게 됐다. 지금도 간간이 야간에 슬로프 정상에서 바라봤던 풍경들이 떠오르곤 한다. 이 정도이면 'whatever it takes'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리송하다.
유력한 후보가 아직 남아있다. 바로 '승진'이다. 처음에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일하다 보면 때가 되면 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꼭 할 필요가 있나'하는 어떻게 보면 나이브한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직장 생활 계속하려면 최소한 여기까진 해야 한다'는 충언을 자주 듣다 보니, 어느새 나는 약간 세뇌가 되었던 것 같다. 기왕에 열심히 일하는데 남들 하는 건 나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지방 근무도 자처했고, 일에 대해 고찰했다. 개똥철학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노력이나 수고 없이 뭔가를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보수적인 조직에서 싫어하는 많은 걸 갖췄다. 그래서 단계마다 내상도 많이 입었다. 마지막에는 어려운 건 아는데 테스트라도 빨리 받아 보자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첫 승진을 하고 기쁨은 잠시, 허탈함이 길게 몰려왔었다. 잠깐, 어벤저스 주인공들이 인류를 구하고 허탈했을 리가 없는데? 아쉽지만 이것도 탈락이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누가 내 마음을 콕 찌르며 훈수를 둔다. '이봐, 헛똑똑이 양반. whatever it takes는 네가 정말 좋아하던지, 진심으로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그만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대학 타이틀, 직함 따위는 'whatever it takes' 자격 미달이다. 스노보드는 '젊은 날 내가 정말 좋아했었구나'하고 열정만은 인정해 주고 싶다. 물론 나는 어벤저스 용사들처럼 인류를 구하거나, 마리오 드라기처럼 유럽 경제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whatever it takes' 하나쯤은 가지고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