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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 Sep 15. 2022

시처럼 살고 싶은 혹은 시 없이도 좋을

트레바리_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너를 처음 만난 건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질 때쯤이었지. 눈썹달이 인사하는 청명한 가을밤에, 나는 너에게 말했었어.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란 시를 아나요?달이 떴는데, 왜 전화를 해? 진심으로 의아함을 고스란히 담은 네 어벙벙한 표정이 새삼 귀여워서 나도 덩달아 베시시 웃었었는데...


어쩌면 달밤의 시 한구절에 마음이 쉬이 몽글몽글해지는 나와 저 푸른 달 너머의 우주는 어떤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더 궁금해하던 너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하지만 내 감성이 어디 즈음에 가닿아 있는지 알수는 없어도, 그저 가만히 내 말에 고개 끄덕여주는 너의 고요함이 나는 좋았고 내가 살면서 한번도 의문을 품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던 너의 열정이 근사해보여서,우리는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지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 라는 키팅 선생님의 말을 신봉하던 나는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의 유용성을 믿는 너를 데리고는 온갖 전시회, 미술관, 음악회를 데리고 다녔었는데, 어땠더라...프리다칼로의 그림을 보며 나는 그녀의 가여운 영혼과 치유로써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고, 너는 디에고리베라의 벽화와 멕시코 혁명에 대해 설명해줬어.


반도네온 연주를 들으며 같이 탱고 추고 싶어, 말하던 내게 너는 흔쾌히 그러자 대답해줬지만 사실 너는 탱고와 보사노바가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었고 서점에 가면 문학코너를 맴돌며 이 시가, 이 문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꿈꾸듯 말하는 내게 너는 이게 요즘 관심사라며, 나로썬 용어도 생소한 전공서적들을 안겨주곤 했지. 그렇게 우리는 참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였나봐


하루는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 란 노래를 들으며 내가 또 말했지. '이 가사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 이 노래를 꺼내먹으라니!!! 나는 시같은 가삿말이 있는 노래들이 좋아' '응 그래' 성의없이 대답하던 네게 심통이 나서 샐쭉해진 눈으로 쳐다본 그 때, 내 시선에 담긴 건 무심코 한번 가보고 싶다했던 카페에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일념으로 네비게이션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너였어.


그래, 노래말이 어떻든 뭐가 중요하겠어 이렇게 너의 한결같은 헌신에 마음이 녹아내리는데... 탱고든 보사노바든 그저 나랑 함께면 뭐든 괜찮고 좋다는 다정한 네가 있는데.. 내 세상에 너를 초대하고, 네 세상에 내가 물들어가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 때만 해도 믿었어


그랬었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결국 우리의 연애는 끝이 났지. 시처럼 살고 싶었던 나와 시없이도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갈 너의 간격은 그토록 멀었나봐. 시시때때로 부풀어오르는, 함께 나누고 공감 받고 싶은 감정들이 늘어만갈수록 여전히 내 말에 예의 그 벙벙한 표정을 짓는 네가, 귀엽기 보다는 이제는 마음이 헛헛해졌고 너 역시도 내 감정이, 감성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에 점점 무력함을 느꼈겠지.


그런 소소한 좌절들이 견디기 힘들만큼 쌓일 때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우리는 이별을 치뤘어. 두 개의 세상이 온전히 소통한다는 건 그렇게도 참 어려운 일이였나봐


그후로 이렇게나 시간이 흘러, 사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이 책은 너에게 주려고 고른 책이였는데, 끝내 전해주지 못한 마지막 선물이 되었지만...이제와 책장 한 구석에 치워뒀던 책을 다시 끄집어내어, 이 책을 매개로 이런 글을 쓰게 되다니, 인생은 참 별스럽기도 하지.


돌이켜보면 이 책을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의 이면에는 나는 이런 세상에 살아, 이런 나를 알아줘, 라는 이기심이 있었던 것 같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하기 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이해받고 싶어해서 미안해. 이미 너는 시 한 구절 빌리지 않아도 온 몸짓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너의 사랑을 다 헤어리지 못해 미안해. 그러니 시 따위는 잊고, 시 한 편 없이도 좋을 세상에서 내내 행복하기를 바라.


나도 이런 나로 잘 살아볼께. 여전히 시처럼 살고 싶지만, 시인이란 사랑을 "사랑"이란 말없이 전달하는 사람이다, 말에 감동받곤 하지만 사랑만큼은 은근과 은유가 아니라 직진도 꽤 괜찮다는 걸 너에게 배웠으니까. 다음 사랑은 더 잘할 수 있을거야,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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