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파울루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말했듯, 교육은 학습자가 자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혁의 주체로 서게 만드는 일이어야 했다. 나 역시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품었다. 2022 개정 교육과정 또한 ‘학습자 주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등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교육적 이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점수를 받아 남들이 인정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돈을 많이 버는 삶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공부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쟁 수단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 이건 시험에 나오나요?”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시험에 나오면 공부해야 하고, 나오지 않으면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사유보다 효율, 토론보다 암기, 질문보다 정답이 중요했다. 시험이 끝나면 교과서를 덮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학기 말, 교실에서 교육이 사라지는 이유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과 소득으로 환산된다.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돈을 잘 벌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자리는 줄어들고,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학생들은 이미 사회의 구조를 체화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이해하면서도, 고민했다.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배움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일 뿐일까.’
기간제 교사는 학교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정규직 교사와의 보이지 않는 위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연차가 높을수록 꺼리는 업무는 자연스레 기간제 교사에게 돌아왔다. ‘호봉제’라는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 월급이 오르기에, 일을 잘할 이유가 없어진다. 대신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늘 기간제 교사나 신규 교사였다.
2010년,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50대 교사는 폭력성을 드러내어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다. 기말 시험이 끝난 후 서술형 평가를 공동 채점했다. 한 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그 사람은 교사용 지도서에 나온 답만 정답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답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의미가 유사하다면 정답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했다.
그 말이 그 선생님의 자존심을 건드린 걸까. 그 사람은 책상 위에 있던 책을 마구 집어 던지며 “그런 식으로 가르칠 거면 교사 자격이 없다”고 소리쳤다. 머리가 하얘졌다. 그날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며칠 뒤, 그 선생님이 교감에게 내 험담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학교는 계약 연장이 가능한 자리였지만, 내 계약은 끝내 연장되지 않았다.
이듬해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갑질’을 경험했다. 시험 문제는 공동 출제가 원칙이다.
그런데 동학년 교사가 내가 만든 문제를 아무 말 없이 자기 멋대로 바꾸어 버렸다.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 바꾼 사람이 책임지겠지” 하며 체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작아졌다.
기피 대상이던 학생안전부나 방과후학교교육부 같은 과중한 업무는 늘 내 몫이었다. 어느 중학교에서는 부장 교사가 모든 일을 내게 일임한 채 책임을 회피했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들의 교권 침해도 잦아졌다. 수업 중 자는 학생을 깨우면 책상을 발로 차거나 욕을 하고 나가기도 했다. 수업을 방해하며 큰소리로 웃는 학생, 교사에게 인신공격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교사들은 분노를 삼키고 침묵으로 버텼다. 학생들이 무례해질수록, 교사들은 더 무력해졌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근무했던 어느 신설 중학교에서는 1학년 담임을 맡았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던 학생들이 뒤로는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교사들을 험담하고, 특정 학생을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사이버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당해온 학생도 있었다. 피해를 호소했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들은 매번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일이 반복되자, 그 학생의 어머니는 녹음기를 교복 주머니에 넣어 보냈다. 결국 그 아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안학교로 전학 갔다.
그 학교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면 아무리 많은 목격자가 있어도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심지어 학부모까지 “다른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싫어해서 모함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때 깨달았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간에 대한 환멸이 밀려왔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결혼 후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 더 교단에 섰다. 그러나 학교는 달라지지 않았다. 방과후 업무와 세 개 학년의 수업을 동시에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3월 중순 한 반의 담임교사가 갑자기 휴직하자 교감은 아무런 협의도 없이 나에게 담임을 맡으라고 통보했다. 학기 중에 그만두고 싶지 않아, 부당한 책임을 떠안았다.
몇 주 뒤, 학교폭력 사건이 터졌다. 학교폭력은 담임에게 가장 버거운 업무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언어폭력을 참던 학생이 어느 날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면, 누가 더 가해자일까. 학교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학생을 가해자로 부른다. 화장실에서 장난삼아 다른 학생의 엉덩이를 친 아이가 ‘성폭력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장난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고, 기분이 나쁘면 폭력이 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교사는 이제 학생들과 배움을 나누는 존재가 아니라, 모호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떠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담임 업무를 무사히 마쳤지만, 부당한 일의 반복은 내 안의 열정을 서서히 식게 했다.
학교의 비효율과 부조리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한 학기를 마친 뒤, 교문을 나서며 알았다.
학교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즈음부터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의 현실 때문이 아니었다.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감 때문이었다. 정의를 말하던 사람들은 부당함 앞에서 침묵했고,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신앙’보다 ‘성공’을 더 중시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면서도 세속의 권력과 부를 좇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교파, 교단, 교회(건물)이 없는 어느 교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이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동안은 소위 ‘가나안 성도’—교회 밖에서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로 지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가는 조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신으로서의 예수보다 인간 예수를 더 좋아하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인간 예수를 탐색했던 나는 내세보단 현세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내 기준에서) 나빠지고 있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약자들은 배려의 대상이 아닌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같은 책이 그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해도 불행은 무작위로 찾아왔고, 착하게 살아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불합리함을 ‘시험’이나 ‘섭리’로 받아들이는 건 더 이상 나에게 불가능했다. 세상은 신의 질서가 아니라, 확률과 우연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무렵 진화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생명의 기원과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진화론의 세계관은 나에게 전혀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신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복잡성과 우연성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신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천국을 꿈꾸며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라며 불의에 눈 감는 삶은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니었다. 신앙의 유무로 영원성을 약속하는 내세의 꿈보다는, 죽으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삶이 더 공정하게 보였다. 지구에는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단지 인간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에도 더는 공감할 수 없었다.
뮤지컬 영화 <헤드윅>의 〈Wicked Little Town〉 가사처럼, ‘하늘엔 공기밖에 없기에 신비한 운명도, 정해진 연인도, 예정된 계획도 없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하늘은 신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공기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신과 결별했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독서와 글쓰기를 멈추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12장. 다시 읽고 쓰기 위한 멈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