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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리머소녀 Aug 31. 2020

제2의 인생, 이렇게 풀리는구나...

장하다 우리 남편!

시카고 외곽의 아주버님 댁은 온 가족이 축구를 해도 될 만큼 큰 뒷마당을 가진 넓은 집이었지만, 지은 지 30년도 넘어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차고(garage) 바로 위에 위치한 게스트룸은 난방이 잘 나오지 않고 외풍이 심해 전기장판 온도를 잔뜩 올려놓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있어도 코 끝이 시렸다. 조카 방도 블라인드 사이로 찬바람이 솔솔 들어오긴 했지만 난방이 빵빵하게 나와 따뜻했다. 세 돌이 안된 둘째 아이는 나와 함께 따뜻한 조카 방에서 잤고, 큰아이는 아빠와 함께 써늘한 게스트룸에서 자다가 새벽녘에 춥거나 엄마 생각이 나면 둘째와 내가 자고 있는 침대로 파고 들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큰아이가 엉엉 울면서 조카 방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는 거였다. 아이를 만져보기도 전에 이미 이불속이 후끈후끈했다. 체온을 재보니 103.5F(40C)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얼마 전부터 큰아이 반 아이들이 한두 명씩 아프기 시작하고 바로 전 주에는 거의 사분의 일이 결석한 것 같다고 하더니만 큰아이도 독감이 옮은 거였다.


한국 떠나기 전 독감 예방주사 맞히고 올 정신도 없어 그냥 오고, 시카고에 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는 모습에 설마 별 일 있을까 생각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학교에서 온갖 바이러스에 노출될 큰아이에게만은 예방접종을 신경 썼어야 했는데 말이다. 3일 동안 타이레놀과 이부프로펜을 4시간에 한 번씩 교차 복용시켰는데도 아이의 체온은 해열제 복용 직후에만 잠깐 38도로 떨어졌다가 금세 다시 40도까지 오르기를 반복했다. 4일째부터는 해열제 없이 38도 정도로 열은 조금 잡혔지만, 기침, 콧물에 설사까지 시작되어 결국 일주일 내내 학교를 빠지고 집에서 요양했다.




큰아이가 회복되어갈 무렵 남편은 현장(on-site) 인터뷰를 위해 미국 동부로 떠나야 했다. 기내용 캐리어에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구겨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레 넣고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을까 봐 영양제와 약도 종류별로 지퍼백에 챙겨 넣어주었다.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문간에서 우두커니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낯선 땅에 옮겨심긴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두 아들을 어떻게든 먹이고 키워내야 하는 마흔 살 가장의 어깨는 그날따라 유난히 묵직해 보였다.


남편이 탄 우버가 코너를 돌아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있다가 둘째 아이의 울음소리에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조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엄마, 추워...” 하며 우는 것이었다. 체온을 재보니 103F(39.5C)였다. 맙소사!!! 남편은 멀리 떠나고 큰아이는 이제 막 살아났는데, 어린 둘째까지 독감이라니... 난 이제 어떡하나, 한숨만 나왔다. 형님한테 여쭤보니 미국 소아과에서는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는 약 처방도 안 해줄 게 뻔하다고, 해열제만 주면서 좀 더 지켜보라고 하셨다. 워낙 한국에서도 웬만한 감기는 병원에 가지 않고 자가면역으로 이겨내도록 아이들을 키우긴 했지만, 아이의 고열이 잡히지 않자 혹시 중이염이 오거나 모세기관지염이나 폐렴으로 발전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이튿날은 둘째 아이 옆에 밀착해 돌보던 나에게도 몸살이 강타하고 말았다. 왼쪽 옆구리를 둔탁한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 같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몸살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조카 방 벽들이 눈 앞에서 핑핑 돌고 옆구리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혹시 큰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무서운, 대륙의 독감 증상이었다. 데이퀼(Dayquil, 두 알이 정량인데 한 알만 먹어도 기절하는 독한 미국 감기약)을 먹고 한잠 자고 일어나 정신이 반짝 들길래 부엌으로 내려가 삼계탕을 끓이고 그 국물로 삼계죽도 끓였다. 아이들에게 먹이고 나도 조금 먹었다. 남편에게 인터뷰 잘 끝났다고, 결과는 일주일 안에 알려주기로 했다고 카톡이 왔는데 답도 제대로 못했다. 오후에 회사 주변 좀 탐방하고 호텔로 들어갈 거라고도 했는데, ‘동네 탐방이고 뭐고 빨리 와서 나 좀 누워있게 해 줬으면...’ 생각만 간절했다.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남편이 돌아오고, 주말이 지나고도 여전히 고열이 떨어지지 않는 둘째를 근처 워크인 클리닉(예약 없이 진료 가능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이미 고열이 4일 이상 지속되고 콧물, 기침 증상이 있으면 독감 검사를 할 필요도 없이 독감이 맞다고 했다. 숨소리도 괜찮고 귀에도 이상이 없다고, 고열은 아이의 몸이 바이러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타미플루 같은 약을 처방해주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리고 부작용이 심할 수 있으니, 타이레놀과 이부프로펜만 교차 복용시키며 지켜보라고 했다. 약국에서 파는 천연 비타민을 먹이고 많이 쉬게 해 주라고 하면서 Hydrate (수분 섭취), Rest (쉼), 이 두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중이염이나 기관지염은 아니라니 한시름 놓았지만, 진찰 한 번 하고 150달러를 내고 나오는데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도 독감 검사를 받지 않아서 그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걸리면 그냥 죽어야 ...” 형님이 하신 말씀이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건강이 최고다 아가, 아프지 말자... (Photo by dreamersonya)




아픈 아이들을 돌보느라 일주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인터뷰했던 회사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잘 안된 모양이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더니 크게 실망도 하지 않았다. '거봐, 미리부터 동네, 학교 검색 안 하길 잘했지' 생각도 들었다. 이제 겨우 정 붙인 시카고에서 좀 더 살라는 뜻인가 보다 생각하니 마음 정리도 어렵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큰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비현실적이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콧속부터 폐 속까지 뻥 뚫리는 개운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이렇게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이번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내게 허락된 모든 것들이 내게는 족하다고...


회사에서는 일주일 안에 연락해주겠다고 하더니 어느덧 8일이 지났고, 금요일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주말 지나고 연락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랬는지, 남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기, 우리 심심한데 운동이나 할까? 땅끄부부 좀 틀어봐 봐.”

“어... 그래, 그러자!”


지하실 TV로 땅끄부부 유산소 폭탄을 틀고 두꺼운 후디를 벗어던지고 운동을 시작하려는 찰나, 남편의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Hello? ...... Yes, oh yes. Yes... Yes... Oh wow... that’s great...”


 마이 !!!!! 합격이었다!!!!!


지하실 구석 모니터 앞에 앉아 통화하는 남편의 옆모습과 목소리가 너무 멋있어서 또 눈물이 났다. 아, 제2의 인생이 이렇게 풀리는구나... 배꼽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입 꼬리가 귀 뒤에 걸려 내려오질 않았다. 감사, 기쁨, 감동, 감격, 사랑, 희열... 온갖 감정들이 샘솟다 못해 흐르고 넘쳐 주체할 수가 없었다. 통화가 끝나고 남편과 나는 얼싸안고 지하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와!!! 드디어 해냈어!!!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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