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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리머소녀 Sep 02. 2020

굿바이 시카고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그곳이었는데...

남편의 취직 소식과 함께 축제 같은 주말을 보내고, 그다음 주 남편은 회사에서 Offer Letter(연봉, 복지 혜택, 입사일 등 채용 조건이 적힌 계약서)를 받고 서명해서 보냈다. 회사에서는 급히 와서 업무를 시작해 줬으면 하면서도 가족과 함께 타주에서 이주(relocate)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 2주가 약간 넘는 기간을 주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정신없이 왔는데, 시카고를 떠날 때도 번개 맞게 생긴 거였다.


대가족과 함께 한 취직 기념 만찬 (Photo by dreamersonya)


이사할 집을 구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 남편만 다시 한번 현지 탐방을 다녀오기로 하고, 급히 질로우(zillow.com)와 렌트닷컴(rent.com)에 월세로 나와 있는 집들 중 예산에 맞는 몇 집을 투어 신청했다.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연락이 오고 하나둘씩 투어 시간 약속이 잡히면서 남편은 국내선 항공권을 구매하고 호텔과 렌터카를 예약했다. 한국에서 왕복 두 시간 거리를 매일 출퇴근하느라 고생하던 남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나는 회사 가까운 곳에 있는 아파트들 위주로 찾아봤는데, 남편은 거리가 조금 멀더라도 외곽으로 나가 아이들을 여유롭게 키우고 싶어 했다. 이 넓은 미국 땅에서 출퇴근 거리 30분~1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는 엑셀 시트를 열어 놓고 항목별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원하는 집들을 추리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섯 가지 항목—월세, 회사와의 거리, 학교와의 거리, 학군, 주변 환경/분위기, 집 자체—으로 나누어 각 항목당 5점 만점으로 점수를 주고, 주변 환경이나 집 자체에 대한 평가는 직접 탐방할 남편이 하기로 했다.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는 그레이트스쿨(greatschools.org)을 기준으로 8점 이상의 학교들만 골라냈는데, 미국의 수도 근처라 그런지 대부분의 학교들이 8점 이상이었다. 니치(niche.com)에서 인종 분포를 참고하여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학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왕 미국까지 왔는데 아이에게 다인종, 다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남편이 떠난 동안 나는 아이가 다니고 있던 학교에 전학 신청을 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챙기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주버님 댁 게스트룸과 조카 방, 그리고 지하실 한쪽 면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인데 웬 물건들이 구석구석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낮아지고 가난한 마음에 쇼핑도 거의 안 한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도 짐은 늘어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이렇게 짐에 치이다니, 오호라 곤고한 내 영혼이여...’ 투덜대면서 풀어놓은 옷이며 책이며 장난감들을 태평양 건너온 박스 60개와 이민 가방 8개에 차곡차곡 넣었다. 결국 넣을 공간이 한참 모자라 U-Haul(이사용 트럭이나 트레일러를 빌려주는 업체)에서 두꺼운 이사용 박스를 다섯 개나 더 사 와야 했다. 2층에서 지하실까지 짐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조금 힘들었을 뿐, 한국 떠나면서 했던 중노동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한편, 남편은 월세로 나와있는 아파트, 타운홈(옆집과 벽을 맞대고 있고 마당이 작거나 없는 집), 싱글 패밀리 하우스(앞, 뒤로 마당이 있는 전형적인 미국 집)를 종류별로 둘러보며 점수를 매겼다. 그리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심의 비좁은 아파트에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출퇴근 거리가 다소 멀어지더라도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우리는 요리 유튜버들의 주방처럼 하얗고 반짝거리는 주방을 가진 깔끔한 타운하우스에 신청서(application)를 넣었고, 원하는 날짜에 이사(move-in) 해도 된다는 컨펌 메일을 받았다. 이게 꿈인가 싶었다.


시카고 서버브에서 사귀게 된 사람들에게도 소식을 알리고 틈틈이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근처에 살면서 아이들도 같이 키우고 반찬도 나눠먹으며 지낼만한 참 좋은 사람들인데, 정들자 이별이었다. 그간 폭풍 공감하며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던 언니의 둘째 아이가 마침 첫돌을 맞아 떠나기 전에 함께 축하해줄 수 있어 기뻤다. 바이블 스터디에서 만난 교포 언니들이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어 최후의 만찬도 함께 했다.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설날... 명절마다 우리 네 식구까지 거두어 먹여주시고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신 형님의 친정 부모님과 동생과도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고작 두 계절을 이곳에서 지냈을 뿐인데,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었다. 이사 가서도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주(State)를 옮긴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으랴 생각하니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정든 시카고를 떠나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 동부로 이사 가는 날. 이삿짐은 오전에 U-Pack이라는 업체를 통해 트레일러로 먼저 보내 놓고, 우리는 저녁 비행기로 DC에 떨어지는 일정이었다. 기내용 캐리어 네 개와 유모차만 빼놓고 모든 짐을 실어 보냈다. 사용하던 조카 방과 게스트룸, 화장실, 지하실 홈오피스... 우리가 사용하던 모든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불과 베개 커버들을 세탁해 건조기에 돌려 예쁘게 세팅해 놓고 나니 이제 다음 손님을 받으셔도 될 것 같았다.


박스들과 이민가방들을 싣고 먼저 동부로 떠난 트레일러 (Photo by dreamersonya)


큰아이는 마지막 날까지 학교에 보냈는데, 하교 길에 만난 아이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와서 허그를 하기도 하고 “Goodbye, I’ll miss you...”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와 늘 점심을 먹던 한국 친구는 “Farewell(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에게 하는 인사)”이라며 아이를 안아 주고 갔다. 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를 품에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아이가 입을 삐죽삐죽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나...
한국 떠나면서 친구 서른 명을 잃었는데
시카고 떠나면서 또 서른 명을 잃네...
마지막날, 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를 들고 하교하던 아이 (Photo by dreamersonya)


이제는 우리를 미국 땅에 초청해주고 그들의 공간과 시간과 물질, 네트워크와 노하우를 나눠준 아주버님과 형님, 조카와 인사할 시간이 되었다. 마흔 살 가장이 되어 아내와 두 아들을 끌고 태평양 건너 형네 집으로 들어온 동생은, 반평생을 그리워한 귀여웠던 막냇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동생은 자신의 방식으로 형을 인정하고 사랑했고, 형은 자신의 방식으로 동생을 인정하고 사랑했던 것이었다. 어긋났던 소통은 잃어버린 세월만큼 서투른 표현이었을 뿐, 가슴에 남는 건 결국 감사와 사랑이었다. 시동생과 동서, 펄펄 뛰는 장어 같은 두 조카를 품고 살며 때로는 관심으로 때로는 무관심으로 우리를 배려해준 형님, 그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언젠가는 헤아릴 수 있을까. 동서지간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난 우리 형님과는 몇 년도 더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을 사춘기 소녀 조카도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잘 견뎌주어 고맙고 대견했다. 시카고 한 지붕 두 가족 살이는 우리 일곱 식구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경험이었고, 대단한 인격 훈련이었다.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어 예약해둔 우버가 집 앞에 도착하고, 우리는 유모차와 네 개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차에 탔다.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장 보러 다니던 마트, 남편이 지원했던 코스트코, 교회 가던 길, 남편의 출근길... 이제야 조금 익숙해진 그곳이 우리 눈 앞에서 점점 추억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살아내고 견뎌낸, 그곳의 풍경을 눈과 마음에 지그시 눌러 담으며 공항으로 가는 길, 형님한테서 카톡이 왔다.


동서...
딸내미 피아노 레슨 내려주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어.
참다 참다 터졌는데 멈출 수가 없네.
자기네 있던 지하실은
한동안 못 내려갈 거 같아.
조심해서 잘 가고 도착하면 연락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코 끝에 옅은 흙냄새가 느껴지고 나뭇가지마다 연둣빛이 슬쩍 돌기 시작하는 봄의 문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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