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리머소녀 Sep 08. 2020

응? 이사 오자마자 국가 비상사태 선포?

절묘한 타이밍에 옮겨온 우리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던 메릴랜드에서의 첫 밤, 우리 네 식구는 마스터 베드룸에 붙여놓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극도로 피곤했던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고, 다음날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세 남자를 보니 이게 꿈은 아니었구나, 안도했다. 산전수전공중전 함께 겪으며 끈끈한 전우애를 쌓아온, 이제는 군대 동기 같은 남편과, 한국과 시카고를 떠나오면서 어쩐지 훌쩍 커버린 것 같은 큰아들, 그리고 포동포동 젖살이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엄마 껌딱지 둘째 아들. 함께 지나온 광야 같은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우리 네 식구가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으며 많은 새들이 깃들이기를...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보물 1, 2, 3호를 보며 잠시 기도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부엌으로 내려가 커피 그라인더에 피츠 커피(Peet’s Coffee) 홀빈을 갈아 커피를 내렸다. 잠옷 바람에 폭탄 맞은 머리로 부엌에 내려가도 괜찮은 자유함이라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은은한 커피 향이 하얗고 반짝거리는 주방에 퍼지기 시작하니 아, 여기가 내 집이로구나 싶었다. 주방 아일랜드에 서서 베이글, 스크램블 에그와 그릭 요거트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는 부지런히 서류를 챙겨 큰아이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 오피스에 방문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는 바람에 메릴랜드주의 모든 공립학교들이 2주간 휴교를 결정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얼른 아이를 등록이라도 해놔야겠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오피스 선생님들은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문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2주간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unbelievable (믿을 수 없다)”이라고 반복해서 힘주어 말했다. 우선 학교 등록을 위해 작성할 서식들을 줄 테니 2주 후에 다시 방문하라면서, 아이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면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별도의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ESL 센터에 연락해서 테스트 예약을 잡아보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나오는데, “Take care, stay safe (몸조심하며 잘 지내)”라는 인사가 돌아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안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서 나와 ESL 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2주간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면서 그 후에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Take care and stay safe (몸조심하며 잘 지내)”라는 인사가 들려오자 어쩐지 좀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는 고국이 먼저 몸살을 앓는 걸 마음 졸이며 지켜봐 온 터라, 이게 2주 정도 문 닫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카고를 떠나며 많이 힘들고 허탈해했던 큰아이를 당분간 집에 품고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카고 식구들한테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더니, 그곳의 공립학교들도 2주간 휴교령이 떨어졌다는 답이 왔다. 아이가 참석을 못하고 떠나오느라 속상해했던 학교 뮤지컬 행사도 전부 취소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며칠만 늦게 떠났어도 아이 학교 친구들과 인사도 못하고 올 뻔했던 게 아니었던가. 참 절묘한 타이밍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근처 Chick-fil-A(치킨버거와 치킨너겟이 맛있는 패스트푸드점)로 먹으러 갔다.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미끄럼틀이 있는 어린이 놀이 공간은 잠겨 있었고 COVID-19 감염 위험으로 당분간 오픈하지 않는다는 사인이 붙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우리 가족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위, 아래로 훑어보며 슬쩍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뉴욕, LA에서 동양인들을 향한 무차별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터라 햄버거빵이라도 맞을세라 모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오후에는 차를 보러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5년간 잘 타다 온 소렌토 생각에 기아자동차 매장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동공이 살짝 풀린 아랍계 세일즈맨이 우리 가족을 맞았다. 자기 이름은 ‘만수르’라며 씨익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데 터번 두른 이스탄불 향신료 상인이 오버랩되면서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소렌토, 스포티지, 쏘울... 익숙한 한국 차들을 보니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블랙 텔루라이드도 정말 멋졌는데, 웃돈을 줘도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차 몇 대를 골라 견적을 내 달라고 했더니 Financing(할부 거래)은 안 할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아직 Credit(신용)이 없어서 현금으로 거래해야 될 것 같다고 했더니 옆에 앉았던 백인 남자가 참견을 했다.


“그럴수록 Financing을 받아서 Credit을 높이는 게 좋을걸. 기아차를 통해 Financing을 받으면 차 가격도 할인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할부와 현금 거래 옵션 두 가지로 견적을 내 달라고 하고는 신용 조회를 위해 개인정보를 적어서 만수르에게 건넸다. 매장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도리토스도 집어먹으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TV 화면에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했다. 국가 비상사태 선언(Declaration of National Emergency)이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발표를 하는데, 기아차 매장 내 모든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TV 주변에 둘러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미국에도 코로나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는구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던 미국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상사태 선언이 끝나고 매장 직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고, 만수르는 우리가 고른 차들의 견적을 뽑아 왔다. 견적서를 보며 설명을 해주는데 진한 중동 발음 때문인지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렌터카 반납일이 다가오니 당장 차가 급하긴 했지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어 이것저것 따져 묻기 시작했다. 여기 적혀 있는 항목이 왜 이 견적서에는 없는 거냐, 왜 두 견적서에 적용된 할인 퍼센티지가 다르냐 등... 매의 눈으로 지적을 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My mistake (내 실수)"였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역시 첫 느낌이 좀 그렇다 했지, 나는 남편에게 눈짓하며 그만 나가보자고 했다.


다른 매장도 좀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하며 일어났는데, 만수르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우리한테 Financing을 받아보지 그러냐고 참견하던 백인 남자를 데리고 왔다. 둘은 우리 앞을 막아서서는 신용 조회까지 마치고 할부로 거래할 수 있도록 일 처리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그냥 가버리는 거 아니라고 협박하듯이 말했다. 아까 그 백인 남자는 차 사러 왔다가 오지랖을 떠는 고객인 줄 알았더니 Financing 쪽에서 한 건 올려보려던 영업사원이었던 거였다. 나참, 기가 막혔다. 더더욱 여기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차의 견적을 내봐 달라고 한 것이지 당장 사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는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장이라도 조금 더 봐야겠다 싶어 월마트에 들렸다. 그런데 매장 안은 약탈당한 것처럼 난리가 나 있었다. 화장지, 손세정제, 세제류는 물론 우유도, 요거트도, 물도, 고기도, 빵도, 파스타면도 없었다. 과일과 야채만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들른 Giant(동네 마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샐러드와 과일, 드레싱만 조금 사 가지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 등록도, 차 구매도, 장 보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아, 이거 메릴랜드 생활도 시작부터 만만치 않겠는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태평양 건너온 미역과 다시마, 카레 가루가 많이 있었고, 쌀과 라면도 있었다. 코스트코에서 어렵게 확보한 화장지도 30 롤이나 있었다. 미국 비상사태 선포 직전 이사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기막힌 타이밍이었는지 감사하면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싹쓸이당한 월마트와 Giant (Photo by dreamersonya)
이전 19화 이게 꿈이 아니기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