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정리하다

옮겨심기의 과정

by 드리머소녀

인터뷰 후 정확히 일주일 만에 미국 이민 비자가 찍힌 네 개의 여권이 택배로 도착했다. 그것도 우리 가족이 오래전 예약해둔 제주 여행을 떠나기 한 시간 전에. 그리하여 우리의 여행은 비자 취득 기념 겸 이민 전 마지막 가족여행이 되었다. 홀가분함, 설렘, 황홀함이 제주의 환상적인 초여름 날씨, 그림 같은 풍경에 더해져 진짜 인생 여행을 했다. 싱그러운 절물휴양림과 곶자왈을 산책하며, 에메랄드빛 바닷길을 드라이브하며, 내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머릿속에서 떠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일단은 달콤한 순간 속에 존재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절물오름에서 만난 하트 (Photo by JK)


환상적인 제주에서 현실로 돌아온 후, 나는 워드 파일에 해야할 일들의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을 벌이기 전에 머릿속에 있는 일들을 카테고리로 묶어보고 중요도/순서에 따라 표로 정리해 놓는 오랜 직업병. 시작이 반이라고 이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 머릿속뿐만 아니라 마음도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다. 해야 할 일이 오백만 개쯤 될 거라 짐작했는데 막상 정리를 하고 보니 크게 두 가지였다.


<소유> 그리고 <관계>의 정리




먼저 우리가 살던 집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키우며 일한다고 신경 쓰지 못했던 집안 구석구석에 주인의 어색한 손길이 닿았다. 심지어 4년 전 이사오던 날 이후 처음으로 닦아본 곳도 있었다. 열심히 때 빼고 광 내고는 동네 부동산을 찾아갔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지난 몇 달간 단 한 건도 거래가 없어 부업을 뛰기 시작했다는 중개인의 넋두리를 한참 들어주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이민 비자에는 신체 검사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미국에 입국하지 않으면 만료된다고 적혀 있는데 집이 안 나가면 어쩌나. 일단 미국에 입국해 도장만 받고 다시 나와서 정리하는 방법도 있다지만 아이들 데리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매매, 전세, 월세 모든 카드를 다 내놓고 기다렸다. 30평대가 대부분인 아파트 단지의 귀한 25평이라 그런지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지만 훑어만 보고는 연락은 없었다.


‘부디... 큰아이 방학 전에 집이 나갔으면 좋겠는데...’


지쳐가던 여름 어느 날, 신혼부부로 보이는 예의 바른 청춘 남녀가 집을 보러 왔다. 집이 아늑하고 예쁘다며 이것저것 묻는 커플을 집안 곳곳으로 직접 안내하며, 우리 집 셀링 포인트를 열심히 보여줬다. 부동산 중개인은 옆에서 신나게 맞장구치고.


이튿날 그 예쁜 커플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그렇게, 수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정든 집과의 이별이 성큼 다가왔다.


큰아이 방학식 이틀 전이었다.




금융자산 정리도 큰 숙제였다.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무슨 포트폴리오가 이렇게 복잡한지. 아무리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하지만 계란 장사 나가도 될 판. 풍차 돌리기 따라 한답시고 들어놓은 각종 적금, 예금들, 개인연금, 종신보험, 실비보험, 암보험, 자녀들 교육보험... 내 심리 상태만큼이나 복잡하고 실속은 없어 보였다.


미준모를 뒤져보니 영주권자가 된 해부터 매년 해외 금융계좌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닌지라 보통 예금 계좌 한두 개, 실비보험 정도만 남겨두고 정리한다고 한다. 우리도 고민하다가 실비보험과 연금, 원화 계좌와 달러 계좌 하나씩만 남기고 전부 해지하기로 했다.




가장 고된 노동은 가구, 가전들, 구석구석에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해외 이사를 할 때 보통 ‘큐빅(1세제곱미터)’ 단위로 부피에 따라 값을 매기는데, 꾹꾹 눌러 담아도 얼마 들어가지 않는데 비해 비용은 엄청나다. 이사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해외 파견 주재원들은 쓰던 걸레까지 챙겨 간다고 하던데, 생돈 주고 가려니 집 안의 가구와 가전, 소품들을 하나씩 째려보며 값을 매겨야 했다. 비용을 떠나서 데려갈 가치, 의미가 있는 물건인지. 그게 아니라면 과연 이 물건을 챙겨가는 게 비용 대비 효용이 있을지. 차라리 버리고 가서 새로 사는 게 나을지.


처분할 물건, 해외 이삿짐으로 보낼 물건, 이삿짐 보내 놓고도 사용하다가 처분할 물건, 사용하다가 이민가방에 넣어갈 물건... 분류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했다.


‘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수년간 열심히 일해 마련한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 금융자산, 물건들을 처분하고 정리하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민이라는 게 단순한 해외로의 이사가 아니라 새로운 토양에 뿌리째 옮겨심기는 과정이구나. 불필요한 가지는 쳐내고 잡초는 뽑아내고 최대한 가볍게, 쓸모 있고 열매 맺을 가지만 고르고 챙겨가는 과정이구나. 이 과정 자체가 진짜 인생 공부로구나. 수고롭고 힘들지만, 이 공부, 이 과정, 잘 버텨내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마음을 잡고 또 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