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퇴학 그리고 이별
물리적인 이민 준비보다 더 중대했던 건 우리 가족이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사회, 그 안에서 맺고 있었던 다양한 관계들을 정리(closure)하고 잘 이별하는 일이었다.
미국 시카고행 편도 항공권 네 장을 사고 나서야 비로소 남편은 양복 상의에 품고 다니던 사표를 던졌다. 밤늦게도 식사 중에도 주말에도, 명절에도 휴일에도, 심지어 휴가지에서도 시도 때도 없는 전화와 이메일의 노예였던 남편. 극심한 업무 로드와 스트레스로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동맥까지 뚫은 남편. 이 악물고 딱 3년만 버텨보자고 결의를 다졌건만 같은 회사에서 무려 9년 9개월을 버틴 거였다.
나 방금 사표 내고 나왔어.
무덤덤한 남편의 한 마디에 수많은 감정이 느껴지면서 뜨거운 것이 저 밑에서 올라왔다. 물고 뜯으며 밟고 올라가든지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직장 생활을 경험해본 나는, 생계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제쳐두고 남편의 퇴사에 진심으로 기립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잘했어. 수고했어. 파티하자.
자, 이제는 큰아이를 퇴학시킬 차례였다. 경기도 수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 한 학년에 스물서너 명씩 세 반 밖에 없는 아담한 학교에서 주름잡고 다니던 2학년 아이였다. 더 큰 세상을 경험하면 글로벌한 인재로 자랄 수 있을 거라는 둥, 미세먼지 없는 곳에서 마음껏 뛰놀자는 둥, 하늘이 내린 기회는 일단 잡고 보는 거라는 둥... 아이의 귀엔 핑계처럼 들렸을 거였다. 자기는 절대로 미국 안 가고 한국에 살 거라더니 어느 순간 체념하고 헤어짐을 준비하던 아이 모습이 짠했다. 파란 책가방에 파란 신발주머니를 들고 등교하는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눈에, 마음에 꾸욱- 눌러 담으며 자꾸만 코 끝이 시큰해졌다.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며칠 후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 아빠의 직장 때문에 가는 거냐, 어느 지역, 어느 학교로 가는 거냐는 질문에 아직은 정해진 직장도 학교도 없고 일단 들어가서 살면서 알아보려고 한다고 대답했더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름도 휘황찬란한 교육부 보고용 특별 위원회인가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해당 자녀의 학부모, 교장, 교감, 교무주임, 학부모 회장, 학교폭력위원회 회장, 담임교사에다가 경찰까지 출석해서 말이다. 산 너머 산이로구나, 한숨만 나왔다.
머리도 마음도 터질 것 같았던 나는, 막 퇴사한 남편을 저 특별한 위원회에 혼자 보냈다. 남편은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하고는 깔끔하게 처리하고 돌아왔다. 역시 내가 안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틈틈이 만나 인사를 나눴다. 나를, 또 우리 가족을 만나러 곳곳에서 먼 걸음 해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 아이 친구 엄마들, 동네 이웃들, 교회 식구들... 선물에 카드에 금일봉에 힘들 텐데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며 따끈한 집밥과 간식을 챙겨다 주기도 하던 손길들... 이런 사람들을 어디 가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철철 넘쳐흐르는 정을 퍼담고 또 퍼담으며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글로벌 시대 아니냐고, 자주 올 거라고, 미국에도 꼭 놀러 오라고 씩씩하게 인사했지만 그들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아... 이별은 언제쯤 쉬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