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리 Jul 18. 2022

나이듦에 대하여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름"

지난번 엄마에게 보내주고 다시 전해 받은 이해인 수녀님의 “꽃잎 한 장처럼” 을 읽고 있다. 올해 78세가 되신 수녀님은 여전히 꽃을 좋아하시고 시를 쓰시며 노년의 수도 생활을 하고 계신다. 2008년 대장암 치료도 잘 이겨내셨지만 78세의 나이에 아프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시 속에서 통증에 대한 서글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담담해지길 기도하는 부분들을 보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한국 전쟁시 부산으로 피란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납북된 험난한 시기를 통과한 수녀님은 어려서부터 시에 관심을 보이시고 수녀회 입회 후 이해인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나는 어떤 세례명으로 해야할지 고심하다가 이해인 수녀님과 같은 세례명인 클라우디아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클라우디아라는 성인도 대단하고 또한 그 세례명을 갖은 이해인 수녀님처럼 자기 길을 올곧게 걸으면서 시인의 아름다움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0대때 1년 동안 성당 교리교사를 하면서 우연한 기회로 수녀회 피정을 몇차례 갔었다. 내가 간 곳은 까리따스 수녀회였는데 그 곳에 들어서면 늘 따뜻하고 부드럽게 반겨주는 바람이 아늑하고 좋았다. 장미 정원과 잔디밭에 둘러 앉아 묵상을 나누던 시간들, 그 때 알게 된 분 중 오랫동안 피정을 참여하고 계시던 분이 수녀회에 입회하여 내가 세번 째 피정에 간 날 수녀님 옷을 입고 맞아 주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회색, 흰색, 검정색의 수녀복을 보면 지루한 옷에 꼭 갇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마 수녀님들에겐 그 옷이 무엇보다 편하고 좋은 옷이었을 것이다. 무채색의 옷이지만 평생을 약한자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는 성직자들의 마음은 봄꽃보다 화사하고 다양한 색을 갖고 계셨겠지.


노년의 삶은 누구나 육체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다. 78세의 아픈 몸, 여러 통증들과 코로나 백신으로 인한 힘겨움, 가장 친한 수녀 친구를 최근 먼 곳으로 떠나보내신 아픈 마음까지 슬픔을 마주하는 시가 많이 보였다. 이제 수녀님 자신을 돌보아야할 때라는걸, 이기적인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걸, 솔직하고 담담한 수녀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기적인 기도


하느님

오늘은 몸이 많이 아프니

기도가 잘 안 되지만

되는대로 말씀드려 봅니다


앞으로의 남은 날들이

어느날 부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될 거라 생각하면

종일토록 우울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스스로 사물을 분간하며

내 손으로 밥을 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을

꼭 허락해 주세요


누가 무얼 물으면 답해주고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온전히는 아니어도

적당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병명 없는 통증도 순하게

받아 안을 테니

오랜 세월 길들여 온

일상의 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건강과 자유는

허락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그동안 내내

남을 위해서만 기도했으니

오늘은 좀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도 되는 거지요?

---


아픈 시어머님이 계셔서 그런지 노년에 내 몸 하나 건사하며 걷고, 먹고, 대화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간절함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건강과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기적인 기도를 청해야 하는 수녀님의 마음은 모든 아픈 노인들을 대신하는 것 같다. 더 시간이 지나 건강과 자유를 잃었을 때 느끼게 될 좌절감, 그 두려움은 얼마나 클까.


어머님이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고 우리집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긴지 1년하고 1개월이 흘렀다. 13개월 동안 어머님은 조금 더 천천히 걷게 되었고 이런 저런 몸의 통증들도 더 많아졌다. 오랜 기간 냉담하시다가 최근 성당에 다시 다니고 싶다고 하셔서 어제는 교적을 옮겨드리고 아이 첫 영성체 교리 가는 길에 같이 들러 교무금 책정을 하는데 어머님이 직원분께 혹시 나중에 요양 병원 같은 곳에 들어가면 교무금 납부는 어떻게 하는지 물으셨다. 어머님 스스로도 언젠가 거동이 불편해지면 성당조차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 늙어가는 일이, 그것도 몸이 불편한 채 나이 들어 간다는 일이 참 쓸쓸한 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름” 그림책에는 할아버지와 바다에서 함께 헤엄치고 즐겁게 놀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하나 하나 기능을 잃어가는 마지막 여름이 소년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얘야,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지막까지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미소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무언가 하나씩 잃게 되는 순간에도 늘 웃으며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소년과 더욱 기발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부드러움을 잃었을 때에는 굳어 버린 손 대신 그물을, 빛을 잃었을 때는 수평선 너머의 배들을 셀 수 없음에도 “오늘은 빨간 배 4,633척과 파란 배 두 척이 항해 중이구나. 게다가 노란 물방울무늬 잠수함이 날아다녀!” 하고 말하며 웃는다. 움직임을 잃었을 때에는 “우리 강아지, 혹시 물고기를 담을 양동이는 챙겼니? 내 지느러미가 언제 멈출지 몰라!”라고 말해주는 여유까지 있다. 소리를 잃었을 때에는 “더 크게 부르라니까. 안 들려!”라고 말해서 더 크게 소리치며 웃게 만든다. 그러다가 마침내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고 소년에게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오래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어느 날 문득, 먼 길을 떠나시게 된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깨달았어요.

하나씩 하나씩 잃어 가다가 결국 사라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요.

나는 할아버지가 잃은 것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웠어요.

하지만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사라지기 전에 할아버지는 아주 커다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요.”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잃은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해내는 어린 동생과 함께 바다에 간다.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커다란 미소는 소년에게 남아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슬픔 속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또한 어떤 힘겨움이 닥쳐도 피하지 않고 직면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주고 싶었던 건 감내하고 받아들이며 웃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미소와 미래에 만날 나의 노년에 필요할 미덕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름 | 글로리아 그라넬 글 | 킴 토레스 그림 | 문주선 옮김 | 모래알 | 2020.08.18



작가의 이전글 나를 일으켜 주는 너의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