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eamHunter Mar 05. 2024

내가 속한 세계관

억압, 환유, 무의식, 언어

백상현 교수님 수요 라이브, 정신분석을 쉽게 설명하는 강좌를 듣고 살을 더하면서 요약해 봅니다.

늘 섹시한 백 교수님


굳이 정신분석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악마가 들어와 잠시 장난질하고 나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그런 것들이 속세라서 수양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무의식이라고 생각하고요.


무의식은 해부학으로 검증할 방법도 없고 실체도 명확지 않기에 그 존재를 논하는 우리 같은 자들을 아예 비과학 끝판왕이라고 혐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프로이트는 만인의 적이며 라깡은 희대에 사기꾼이라고 폄하하는 석학들도 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을 억제하고 산다는 정신분석 대전제는 동의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억제하는 힘이 얼마나 나약한지 그 욕망 (주이상스)은 어떤 식으로던 표현되어 나온다는 것도 모두 경험하셨을 거고요. 만약 나는 그런 욕망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하더라 거룩하게 통제하고 산다는 분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꼰대'일 확률이 높습니다.


문명 속에서 살아야 하기에 이렇게 억제된 욕망은 무의식에 저장됩니다. 이것이 프로이트 선생님 이론 기본이자 시작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어떤 과정을 통하여 무의식은 생성되며 어떤 모습인지는 라깡 쎔 말씀을 빌려서 보겠습니다.


라깡 쎔 글 중에 '무의식은 언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유명하지요. 그럼 언어를 가지지 못한 인간들은 우리랑 다른 무의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고로 인해 소아기에 문명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습이나 언어를 배우지 못한, 늑대나 원숭이들에게 양육된 모글리 신드롬을 앓는 아이들을 훗날 구조하여 우리 사회에 데리고 오면 정신병자로 취급받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사례를 보아서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디즈니, Tarzan, 1999 - 언어가 없으면 현실에선 얘처럼 클 수 없다는..


다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이야기로 와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환유, 은유처럼 사물에 이름을 주는 일로 시작하는데 이것이 억압이라고 합니다. 가령 아기에게 엄마는 우주입니다. 따듯한 잠자리이며 내 불쾌함을 제거주는 청소부이고 젖을 주는 맛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엄마에게 바라는 것, 받는 다양한 행복까지 고려하면 그 존재를 '엄마'라는 단어, 상징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폭력이며 억압입니까?


하지만 '엄마'라는 단어를 빨리 배우는 아이는 그만큼 문명에 진입하는 속도가 빠르겠습니다. 아이가 엄마라는 상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언어를 주입시킵니다. 엄마라는 은유를 시작으로 아빠, 할머니는 물론이고 청결함에 대한 규칙, 시간 개념, 예의, 문법 정말 다양한 것들이 아이를 옥죄기 시작합니다. 그냥 엄마 젖이나 먹고 똥이나 싸면서 쿨쿨 자고 싶은 아이 욕망은 강력한 규율 아래에서 억압받지요.


그럼 다은 짐승들은요? 대부분 짐승들은 태어나서 몇 시간 후면 달리기를 시작하고 사회를 이루는 더 고등한 짐승들 역시 생후 몇 개월이면 사냥을 하거나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만 우리 인간은 기본 18세는 되어야 겨우 성인으로 취급받고 개인 편차는 있지만 서른 정도 되어야 자기 세계관이 정립된 인간이 됩니다.


서른까지 갈 것은 아니나 대 여서살까지는 부모가 막대한 시간이랑 노력을 투입한 양육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 어떤 짐승들보다 나약한 우리는 그 긴 양육 시간에 엄청난 은유 억압을 받습니다. 이것은 엄마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 끝없이 올라가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구약 십계로 시작한 열 줄짜리 법이 지금 헌법, 가정법, 민사, 형사 어쩌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엄청나게 늘어나는 법진화 과정만 보아도 알겠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언어는 그뿐이 아닙니다. 다양한 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살면서 쓸일도 없는 영어까지 강제로 배워야 합니다. 사과는 an Apple이라고 치환하여 암기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필요 없는 an을 왜 앞에 붙이는지, the라고 하면 어떻게 상황이 변하는지 작살나게 맞아가며 시험공부를 하고, 다양한 규칙이랑 법을 문신처럼 가슴 속에 새겨야 합니다. 문명 속에 있는 한 평생 이런 은유를 통한 억압은 끝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 선생님 역시 여자를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여자들이 보이는 은유는 우리 남자들보다 더 성숙하고 심오하며 다릅니다. 춘원 이광수 소설 유정有情에보면 '여자 말은 거꾸로 들어야 한다'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가끔은 그대로 들어야 하는데요. 언제 거꾸로 들어야 하는지는 여자마다 정한 규정이 다르며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또 달라집니다.


이야기가 샜습니다. 다시 무의식으로 갑니다. 이렇게 은유를 통해 억압된 것들이 무의식으로 쌓인다면 무의식은 당연히 언어 구조이겠군요.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내 강렬한 욕망이 의식 검열을 피해 꿈이나 실수 혹은 분석 시 자유연상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면 그것은 신경증상 혹은 심하게는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정신병이랑 신경증 차이를 유대인답게 프로이트 선생님은 경제학으로 설명합니다. 즉, 정도차이라는 것이지요. 억압된 욕망이 너무 넘치다 못해 귀 감각을 통해서 환청으로 들리면 정신병입니다. 저도 경험합니다. 10년을 여자 구경도 못하고 자위만 하며 사는 유학생 귀에는 가게에서 열쇠 깎는 기계 소리가 갑자기 여자가 침대에서 흐느끼며 알몸으로 땀을 흘리고 덜덜 떠는 신음 소리로 변합니다. 환청이죠.


이 정도는 너무 심한 예라고 하면 신경증은 그보다 덜한 것들이겠네요. 내가 증오하는 직상 상사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유독 오탈자랑 숫자 error가 많은 것들 따위죠. 내 무의식 속 욕망에는 그 인간에게 잘못된 숫자를 주고 싶은 미움이 가득하다는 반증이겠군요 (이렇게 거칠게 자기 분석하는 것은 이제 피합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갑니다. 은유를 통해서 언어를 배우고 그것은 억압되어 무의식에 구조가 되고 쌓여갑니다. 그리고 다양한 증상이 되어서 그 욕망은 세상에 튀어나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튀어나온 증상이 그 원인인 무의식이랑 일대일 대응된다면 참 쉽겠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죠.


우리 증상이란 늘 다른 모습으로 대체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은유를 통해서 쑤셔 넣고 억압했듯이 그것들은 다른 은유를 통해서 나옵니다. 돈 문제에 치이는 사람이 자꾸만 지갑을 분실하는 실수는 기억력을 높여주는 약을 먹기보다는 돈 문제 해결이 우선인 식으로요 (이것도 너무 거친 예시로 실제로 무의식은 훨씬 복잡하다고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언어라는 억압을 통해서 무의식에 들어가는 우리 욕망은 표출되는 방식도 은유, 즉 언어로 설명 가능하게끔 나오니 우리 인간은 가히 언어 통제를 받고 산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서 무의식은 언어로 된 구조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하지만 의식도 언어이니 의식 & 무의식 모두 언어이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냥 모든 것이 언어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정신병을 진단하는 다른 기준으로, 증상이 언어 논리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신경증이 아니라 정신증으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지난 리뷰 <집단 착각>에서 Todd 쎔은 이런 세계관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으면 내 삶이 더욱 강해지고 풍성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속한 세계관은 한글계, 영어계, 직장계, 유도계, 주짓수계, 작가계, 브런지계 이 정도가 떠오릅니다.


골프계로 들어오라는 회유가 많습니다. 노력 안 해본 것은 아니나 싫습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입니다. 그 안에는 강력하고 웅장한 규율이 없어서 일거예요. 규율이 강력할수록 매력을 느낍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꼰대 갈굼을 즐기는 변태는 아닙니다.


한 시간 유도 매트 위에서 날 옥죄는 그 규율을 즐깁니다. 유도하는 호주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자유로운 그들 역시 23시간을 지 맘대로 살다가 매트 위에서 쪼여오는 그 고통 법칙에 열광합니다. 강해지려고 시작한 유도, 주짓수이지만 결국 남는 것은 규율이고 그 즐거움을 느끼는 자는 실력이랑 상관없이 오래가며 그것을 혐오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유도 세계관을 떠나 그만두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세계를 찾는 노력이 날 건강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지금 세계관을 더 늘이는 것보다 그 안을 깊이 파는 것도 중요하고요. 오늘 글은 그나마 좀 근사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아서 우리 작가님들 독자님들께 뿌듯하네요. 헤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열쇠를 경멸하면 결코 문을 열 수 없다. - 프로이트



노사임당, 2024, 사랑이라는 착각


작가의 이전글 내 책 시집보내기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