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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Aug 28. 2023

브런치 작가로 사는 하루

책 편지

아빠, 브런치 좀 그만해요.

어제 쓴 글이 밤사이 기적처럼 메인에 걸렸을까 기대하며 억지로 눈을 떠봅니다. 아침 먹기 전에 씻으면서 지난 내 글들, 서랍에 저장한 것들 생각하다 하나 더 발행하기로 합니다.


주말에 글을 올리면 알고리즘이 선택하더라도 직접 읽고 최종 선택을 하는 것은 Daum직원일 텐데 주말에도 일을 하려나? 싶습니다. 


어차피 정신분석에 관한 글이라 애초에 대중성이나 핫함이란 내 글에 없으니 그냥 올리기로 합니다. 발행하고 곧바로 설마 일요일 아침 시간인데.. 하는 마음으로 라이크를 확인하니 벌써 <새로-손해사정사>랑 <글마중 김범순> 작가님이 누르신 것을 확인하고 뿌듯함에 쓰길 잘했다 합니다.



그렇게 웃으며 돌아서다 마주한 현실 속 아내는 얼굴이 편치 못합니다. '오늘 무슨 날일줄 알?' 여자들이 묻는 질문은 궁금함보다는 질타라는 것을 알기에 순간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계산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결혼 기념일이라는 말이랑 함께 늙어 디지게 구박 받을 준비하라는 살면서 처음 듣는 저주를 받습니다.


불야 불야 아침은 빨리 때우고 시내 근처로 식사를 하러 나갑니다. 급하게 나가면서도 작가된 마음 가짐으로 랩탑은 꼭 챙기고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론, 시도 때도 없이 글감이 떠오르거나, 쓴 글을 고쳐야 할 부분이 생각나기에 랩탑이 곁에 없으면 불안합니다. 전화기에서 대충 고치는 것은 눈도 아프지만 성에 차지 못합니다.


시내 맛집이라는 곳을 가는 중에 아내가 좋아하는 화방용품 가게 겸 서점이 보입니다. 그래, 여기서 뭔가 하나 사주면서 점수를 따보자는 얄팍한 생각에 들어갑니다. 


"자기 맘에 드는 예쁜 것도 사고 그림 동아리 분들께 선물로 드릴 것도 있나 보자."  



그리고 나는 옆에 작은 책 진열대를 보다가 '정신분석'에 대한 것도 있을까 찾아보니 '철학'코너 옆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정신분석'이라기보다는 '심리학'에 가깝고 대부분은 알 수 없는 처세술 따위만 가득합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 관련해서 호주 의사나 심리학자가 쓴 것이 있을까 보는데 찾지 못하고 그나마 비슷한 것도 저자를 검색하다 보니 온라인에서 사면 반값이라는 것만 알게 되어 김이 빠집니다. 급한 책도 아닌데 굳이 렌트비까지 묻어 있는 이 책을 지금 살 이유가 있을까는 생각이 들자 아내가 있는 쪽으로 건너 갑니다.


한국에 비하면 새로울 것도 없는 물감, 펜, 종이들인데 이상하게 만년필을 보자마자 나를 부르는 환청이 들립니다.  


"작가님, 이거 한 번 써보시죠~"


손으로 글을 쓰지 않은지가 20년이 넘었는데도 만년필은 내 손에 착착 감기면서 파란 잉크로 마련된 이면지에 사각사각 글씨를 새겨보니 없던 시상도 떠오를 지경이고, 종이가 미세하게 펜촉에 갈리는 기분이 새삼 이런 것이던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가격 65불 (6만 원)을 보니 이번 브런치 출판 대회 최종 50인에 뽑혀야 인가받을 수 있는 수준이라 그냥 내려놓습니다.


fionaariva, wax-seal-stamp 

그 아래를 보니 달고나를 데워 먹는 것처럼 생긴 앙증맞은 구리 국자랑 화로 같은 것이 보입니다. 뭔가 해서 보니 도장으로 편지에 날인 찍을 때 왁스를 녹이는 책상 위 작은 대장간입니다. 옆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색을 한 왁스랑 멋들어진 도장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만년필로 근사하게 친필 서명을 하고 마지막에 내 이니셜이 담긴 도장으로 꾹 눌러서 찍은 왁스가 아른 거립니다. 이 정도는 10인에 들어야 결재나올 것을 알지만 언젠가 제 브런치 이니셜 도장을 만들어서 의미있는 곳에 멋지게 쓸 꿈을 꿔 봅니다.





점심을 먹고 여름이 다가온 시드니 시내를 오랜만에 걷습니다. 수박 케익을 파는 곳이 있다고 하여 수소문 끝에 찾아갔습니다. 힘들게 찾아갔지만 안내하는 직원이 영 친절하지 못합니다. 순간 이것은 인종 차별인가? 아니면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부족한 업무 윤리일까? 냉철한 브런치 작가서로서 파헤쳐 보고, 늘 내 편이 되어줄 우리 독자님들께 확~ 일러 버릴까? 구독자 70명 넘는 브런치 작가 매서운 펜 맛을 보여주려다 참습니다.


아내는 수박 케익이 아주 맘에 든다며 먹고 저는 구석에서 다시 랩탑을 켜고 라이크 수를 확인합니다. 글을 올리고 다른 일과를 하다보면 마치 어부가 늘어 놓은 통발에 알록달록 예쁜 물고기들이 들어와 걸린 것처럼 독특한 아이디랑 사랑스러운 글들로 가득한 작가님들이 제 글에 라이크랑 구독을 주시고 갑니다.


그럼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꼭 한 편이라도 진지하게 그분들 글을 읽으며 작가 소개도 챙겨봅니다. 어떤 작가님들이 내 글을 보셨는지 확인하고 싶고, 내가 그분이라고 동일시해서 내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가령, 지금까지 몰랐던 손해사정사라는 직업인이 되어서, 내 글을 그분 시각을 빌려 읽는 기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이 부분이 좋으셨을까? 

왜 내 글을 라이크 했을까? 


이런 상상을 하는 쾌감으로 내 뇌는 몰핀같이 강하고 짜릿한 홀몬을 마구 뿜어 냅니다. 그러니 내 글은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나'라는 독자에게 계속 읽히고 또 읽힙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이도 '나'보다 더 내 글을 사랑하는 이는 없고, 내 글에 가장 열혈 팬은 바로 '나'입니다. 지겹지 않냐고 묻습니다. 아뇨. 70개가 넘는 색다른 안경이 있어서 지겨울만하면 특정 작가님 브런치에 가서 그분으로 변장한 후에 다시 내 브런치로 넘어와 읽으면 내 글은 또 신선하게 읽힙니다. 심각한 중독입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헌책방 하나 눈에 띕니다. 오래되어 절판된 책이라 온라인 구매도 힘든 의미 있는 책이지만 가격은 다시 값이니, 새책에 비해 배이상 값어치가 올라갑니다. 지금 읽을 책도 많은데 책까지 사면 과연 읽을 있을까 망설여지지만 지난 글 <시집보내기-각주>을 떠올려 봅니다. 이제 맘에 드는 책을 사게 되면 누군가 나보다 좋아할 사람도 고려 대상입니다.


Recent Experiment in PsychologySystems and Theories In Psychology 이렇게 두 권이 제가 찾는 분야에 가장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럼 둘 중에 어떤 것을 살까? Recent Experiment를 펴보니 실제 실험 결과를 분석해 놓은 표랑 차트, 그래프가 온통 있는 것이 연구자들을 위한 책 같아 얼른 덮고, 두 번째 Systems & Theories를 보니 제가 평소 궁금하던 내용이 있습니다.


정신분석이야말로 비과학에 끝이며 학문이라고 논하기도 아까운 저질 시간 낭비라고 저주하는 분들에게 이것이 왜 과학인지 설명하는 내용이 처음부터 나옵니다. 우선 과학이 무엇인지부터 규정하는 책 구성이 맘에 쏙 들었습니다. 다 읽지 못하더라도 이 부분만은 꼭 읽으리라는 다짐 하면서 잡아 들었고 그럼 나중에 이 책을 누구에게 시집보내면 좋을까하는 질문에는 늘 저를 응원해 주시는 정신과 의사 <매미>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매미 쎔도 분명 이 책 관심 있어하리라.


   

책방을 다 나오는데 아내가 '와, 이 책봐'하는 것에 눈길이 갔습니다. THE ART OF WAR 손자병법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것도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 보게 될 줄이야. 


그림은 비록 손자랑 상관없는 청룡도를 든 관우랑 진시황 병마용이지만 내용은 손자병법이 맞아서 지나치지 못하고 만지작 거립니다.


그건 또 뭐 하러 사냐고 한 소리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계산대로 갑니다. 손자병법은 언젠가 읽고 싶었는데 기왕이면 영어로 된 것을 읽으면서 이 책 전 주인인 호주 사람이 느꼈던 감정 내지 감동도 함께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분량도 많지 않아서 맘에 들고 가죽 제본되어 있어서 폼도 나고요. 


그럼 다음으로 이 책은 누구에게 시집보내면 좋을까? 브런치 작가가 되어서 알게 된 우리 인기작가 <이상> 君이 떠올랐습니다. 평소 역사서를 좋아한다고 했고 삼국지에도 능통한 친구이니 분명 병법서에 관심이 많을 것 같아, 행여 읽었다 해도 내가 보내는 영문판은 그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    




결혼 기념일 선물도 챙기지 못하는 인물이, 쓸데없는 만년필에 왁스 도장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나, 일면식도 없고 평생 한 번 볼일이 있을까 말까 한 이들을 위해 선물을 사질 않나!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돈만 더 쓰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브런치 작가 아니라면 평생 이야기 들어 볼 수도 없을 사연들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들을 이렇게라도 알게 되어 영광이고 기쁩니다.


세상 밥 맛 없는 것이 책 선물이라던데, 그것은 상대 취향이나 관심 영역을 모르고 막 사줄 때 이야기입니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에게 오래된 Psychology 책을 선물하는 것, 중국 역사에 매료된 작가에게 구하기 힘든 손자병법을 선물하는 것은 분명 다를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책을 읽어 보면서 부분 번역을 하겠습니다. 그렇게하여 책 받으시는 분이 조금 읽기 편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체를 그렇게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분명 내가 읽고 느낀 것을 곱게 남겨서 보내겠습니다. 이러면 단순히 책을 사서보내는 것이 아니라 책을 가장한 편지입니다. 책을 시집보내는 개념을 넘어서, 책 편지로까지 생각이 흐르게 됩니다. 맘에 듭니다.


내 책 편지를 받으시는 분은 그것을 읽고 그것으로 브런치 글을 하나 또 쓸 것이며, 그 브런치에는 내 책편지 내용이랑 사진이 올라가 내가 그 아래 댓글을 쓰는 환영까지 보게 됩니다. Daum주가가 1센트 올라가는 그래프도 보입니다. 내일은 내 글 중 하나가 메인에 걸리는 꿈을 꾸러 가겠습니다. 자, 그럼 브런치 작가는 퇴근하고요.



우리는 각자 싸워야 하는 전장戰場으로 그만 돌아갑니다. 이만.







추신: 매미쎔, 혹시 Recent Experiment가 더 맘에 드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를 구독해 주시는 작가님들도 잊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새기고 다니다 무언가 작가님 이력에 합당하고 관심을 끌만한 것이 있다면 꼭 책이 아니더라도 선물 준비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 이렇듯 시간이랑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언제 뵈올 수 있을까요? 당분간 제 카톡 아이디는 제 브런치 명으로 해 놓겠습니다. 작가님들이랑 더 깊은 교제 원합니다. 총총.



각주 - 책 시집보내기

https://brunch.co.kr/@dreamhunter/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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