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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나물 봄동이 Sep 11. 2016

비 오는 날

나는 지금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 매거진 속 이야기들은 제가 혹은 누군가 겪은 일에서 출발합니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저는 소설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우산! 내 핑크 우산 어디 갔어? 누가 들고 갔어?
-아, 그거 큰오빠가 쓰고 갔어.
-뭐? 그거 내가 용돈 모아 산 건데 그걸 들고 가면 어떡해! 일부러 오빠나 준이가 못 쓰게 하려고 핑크로 산 건데!
-남자는 핑크지, 하면서 들고 가던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5남매인 우리 집에선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전쟁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등교하는, 장남이자 고등학생인 큰오빠가 좋은 우산을 챙겨가고, 그다음은 중학생인 큰언니가, 그리고 나머지 우산들을 6학년인 둘째언니와 4학년인 나, 1학년인 막내 준이가 나눠 들고 갔다. 괜찮은 우산은 먼저 집을 나서는 큰오빠와 큰언니의 차지라서, 낡은 우산을 쓰고 학교 가야 하는 게 난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내 용돈을 모아서 이쁜 3단 우산을 샀던 터였다. 아직 한 번도 안 썼던 건데, 큰오빠가 냉큼 들고 갔다니. 


-아무 우산이나 쓰면 어때. 비만 막아주면 되지. 그리고 우리 셋 중에서 네 우산이 젤 좋은데 뭐.


둘째언니가 입을 한껏 내밀고 가는 나를 달랬다. 언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내 우산이 둘째언니나 준이 우산에 비해 좋은 거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을 뿐, 나는 튼튼하긴 하지만 ‘장자순 여사님 칠순잔치’라고 적혀 있는 2단 우산을 쓰고 가야 하는 현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반장의 생일 초대를 받아서 반장 집에 가기로 한 날인데 이 우산을 들고 가야 한다니! 어젯밤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 포장을 하고 생일 카드에 이 말을 썼다가 저 말을 썼다가 결국 ‘나 너 좋아해’ 대신 ‘생일 축하해’만 적으면서도 배시시 혼자 미소를 지었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꼬이다니. 


비 오는 날, 그렇게 꼬였다고 생각했던 날, 나는 조금 달라졌다. 그러니까... 분명 나는 그때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반장을 좋아했었는데. 반장이랑 결혼할 거라고 일기장에 썼었는데. 그런데 그날 이후 일기장에서 반장 얘기는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야, 너네는 반장 집에 안 가?
-우리 몇 판만 더 하고.


약해지긴 했지만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빗속에서 축구를 하던 우리 반 남자애들은 음식이 다 차려졌을 때에야 반장 집에 도착했다.


나는 운동화에 비가 다 들어와서 양말이 젖었고, 그게 민망해서 제일 마지막에 들어갔는데, 민정이가 내 발에서 냄새난다고 했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고, 평소 미소만 짓던 반장도 소리 내어 웃었고, 나도 따라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그냥 집으로 가고 싶어졌고, 그랬지만 겨우 참고 앉아 있었던 터였다.


남자애들이 들어서자 민정이가 또 한 번 너네한테서 냄새난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또 웃었고, 남자애들은 양말을 벗어 민정이 코에 갖다 댔고, 민정이가 질겁하며 때리려고 하자, 발을 씻는다며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갔다.


나도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양말을 벗고도 싶었지만 맨발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는데. 그래, 나도 차라리 발을 씻는 게 낫겠다 싶어서 욕실에 갔을 때는 애들이 한바탕 발을 씻고 나가고 대만이만 남아 있었다. 대만이는 아예 머리까지 감은 모양인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1학년, 2학년 때 같은 반이라 좀 친했지만 3학년 때는 다른 반이라 멀어졌던 대만이는 장난이 너무 심해서 여자애들의 기피대상 1호인 애였다. 이번에도 혹시나 물을 뿌리고 장난칠까 봐 걱정했는데 


-너도 발 씻으려고? 그럼 양말부터 벗어야지.


조금 놀리는 말투이긴 했지만 다행히 장난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안심하고 양말을 벗고 세면대 쪽으로 가는 내게 샤워기를 건네주기까지 했다. 밖에선 애들이 떠드는 소리와 “얘들아, 이제 얼른 앉아서들 먹어.” 반장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서 왁자지껄 시끄러웠는데


-근데 너 발 예쁘게 생겼다.


대만이의 말이 어떻게 그렇게 잘 들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대만이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나도 얼굴이 좀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큰오빠는 내 핑크 우산을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줬다며 당당하게, 약올리며 말했다. 이전 같았으면 한바탕 난리를 쳤을 텐데 그날 나는 별로 화내지 않았다.


그날 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잠자리에 누워 몇몇 순간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후 내 일기장에는 대만이 이름이 자주 적혔다.


나는 지금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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