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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나물 봄동이 Sep 11. 2016

스물여덟 살 혹은 28, 어느 저녁

하늘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 매거진 속 이야기들은 제가 혹은 누군가 겪은 일에서 출발합니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저는 소설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스물여덟 살. 28세. 욕 대신 내 나이를 중얼거리고는 한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작은 도시를 벗어나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그땐 뭔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다. 아무렴, 그래야 지난 내 10대의 어둠도  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날 압도하지도 않을 거면서 그렇게 고통과 억압이 주어졌다면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새로운 세계이기는 했다. 아니 다행히라고? 다행히 대신 어쨌든으로 고칠까 말까 하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이런. 늦었다고 대리님께 한소리 듣겠군.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대리님에게 세 소리쯤 듣기는 했지만 늦은 게 온전히 메모 끼적대던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출근길에 거래처 들러서 원단 샘플 받아오라는 대리님의 연락을 받은 건 어젯밤 9시 48분이었고, 당연히 거래처와 얘기가 된 줄 알았는데 거래처 문은 닫혀 있었고, 9시 넘어서야 출근한 거래처 사장님은 오후에 올 줄 알았더니 이렇게 얘기도 없이 아침부터 오면 어쩌냐며 짜증을 내셨고, 그 와중에 대리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후 대리님의 전화가 왔을 때 지금 샘플 받아서 가는 중이라고 사장님은 오후에 오시는 줄 알던데요, 했더니 아 내가 오전에 갈 거라고는 말 안 했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실수는 언제나 ‘그럴 수도 있지 뭐’ 할 일이고 나의 실수는 언제나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어?’인 대리님은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3년차 직원이다. 3개월 인턴을 거쳐 6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내게 ‘S씨에게 내가 인생 선배로서 해주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말을 할 때 좀 짜증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크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었고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 학벌에 그 실력에 우리 회사에서 저렇게 열심히 해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라던 술에 취한 부장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하는 편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디자인학과 교수라는 사실이나 그녀가 1년간 이탈리아에서 살다 왔다는 사실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 스스로 자신의 출발점이 나 같은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게 좀 짜증이 날 뿐이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자신은 회사생활을 일찍 시작한 게 조금 후회된다고, 이탈리아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말하던 그녀가 첫 알바비를 유니세프에 기부할 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얘기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에 대해 미소 지으며 말할 때는 ‘으아악!’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만 내지르고 싶기도 했다.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휴학해서도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그렇게 열심히 또 열심히 살아도 결국 졸업할 때는 빚쟁이로 졸업하는, 인턴이나 계약직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것에도 만족해하면서 그 월급으로 학자금 대출 상환을 하고 방세를 내고 밥을 사 먹고 휴대폰 요금을 내면서 ‘생활’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애환에 대해 누구보다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긴 하루가 지났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결혼한다는 대학 동창의 연락을 받았다. ‘축하해’라고 적으며 머릿속으로 통장 잔고가 얼마 남았는지 떠올려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 친구를 제외한 다른 동창들이 카톡 채팅방을 만들었다. 결혼식 갈 거지? 축의금 얼마 할 거야? 오랜만에 다같이 얼굴 보겠다, 신난다. 돈 모아서 선물 주는 건 어때? 그래도 축의금 주는 게 나을걸. 너 차 샀다며? 축하한다. 우린 좀 친했는데 20만 원씩은 해야 하지 않을까? 차를 사서 빚을 내야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는 법! 난 30만 원 생각했는데. 난 10만 원만 할 생각이었는데. 우리 액수 그래도 통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러 대화가 오가는 걸 나는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통장 잔고에 얼마 남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생각하며.


-백수인 난 5만 원만 할 거야. 축의금은 각자 상황과 마음에 맞춰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 뭐 그 액수까지 맞추려 그래. 난 이 방 나간다. 결혼식 때 봐!ㅎㅎ


7급 공무원을 준비하다가 3년이 지나서 9급 공무원으로 바꿔 시험을 치고 있는 Y가 침묵 끝에 한마디 하고는 나갔다.

아, 역시 쿨해. 어쩌고저쩌고 Y에 대한 얘기가 나온 끝에 서로 안부를 묻다가 흐지부지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카톡방에서 나와 은행폰뱅킹 어플에 들어갔다.


통장 잔고 134,240원.


20만 원은 있을 줄 알았는데 왜지? 나는 통장 입출금내역을 보았다. 아…… 다 내가 쓴 게 맞았다. 나 너무 생각 없이 돈을 많이 썼네. 죄책감이 들었다. 반성……하려다 멈칫.

내가 생각 없이, 돈을, 많이, 썼다고?

내가 체크카드로 긁은 내역은 점심으로 먹은 김치찌개 5천 원, 취직했다는 후배와 만났을 때 내가 낸 밥값 2만 원(2차로 카페 갔을 땐 후배가 냈는데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밥값보다 카페에서 더 많이 나왔다), 학자금 대출금과 이자, 전기세나 수도요금 같은 각종 공과금…….


‘야, 숨 쉬는 게 다 돈이야. 월급 123만 원 받으면서 돈을 모으겠다고? 대단한 꿈이네. 물론 모을 수도 있어. 가르쳐줄까? 간단해.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돼. 안 입고 안 쓰고 안 만나고. 내가 그렇게 해서 일 년 동안 딱 350만 원을 모았거든? 거지꼴로 다니면서 속 다 버리면서 사람들이랑 연락 끊기면서 350만 원을 모았단 말이야. 근데 그 돈 지금 어딨게? 오빠 교통사고 나서 치료비에 보태느라 다 썼어. 그냥 쓰면서 살아. 치킨 먹고 싶으면 치킨 사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있음 만나면서. 치맥 먹을 돈 아낀다고, 친구 만나서 쓰는 돈 아낀다고 뭐 얼마나 모은다고. 우리 생엔 로또밖에 답이 없단다. 그러니 그냥 오늘을 즐기면서 가끔 로또나 사면서 그렇게 살아.’


알바하면서 만난 인연으로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K언니가 내가 인턴에서 계약직으로 바뀌면서 월급이 올랐으니 이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했던 말이 되새김질되었다.     




그 애랑은 그래도 대학 때 참 친했는데. 신랑 될 사람도 한 번 같이 본 적도 있었는데. 10만 원은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니야, 그래도 지금 형편이면 5만 원만 할까. Y도 5만 원만 한다잖아. Y는 나만큼 친했던 건 아니잖아. 그리고 Y랑은 다르게 난 회사도 다니는데. 인턴 하면서 힘들 때 그 애가 먼저 연락 와서는 속이 든든해야 한다며 밥도 사주었는데. 그래, 역시 10만 원은 해야겠지?


하는데 내 두 눈에 내 두 발이 들어왔다.


아, 갑자기 내 발이 너무 안쓰러웠다. 어쩌다 나 같은 주인을 만나서는.


오늘도 나는 구겨진 운동화에 내 발을 구겨넣고 구겨진 마음으로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새 운동화를 사고 싶다. 낡은 운동화 속에서 내 영혼도 낡아가는 느낌이다. 새 운동화를 사 신고 산책하고 싶다. 근데 그래도 될까. 내가 새 운동화를 사 신어도 되는 걸까.


-우와.


그 순간 들리는 내 반대편에 있던 지하철 안 사람들의 탄성.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 뭐야, 너무 예쁘잖아.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 있지.

하늘은 자신을 바라보며 감동에 젖은 사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붉게 더 붉게 물들고 있었다.




2016년 9월 9일 금요일. 고마운 친구의 결혼을 마음껏 축하해 줄 수도 없는 저녁.

낡은 운동화 대신 새 운동화를 신고 싶다는 마음이 대단한 욕심이고 서글픈 죄가 되는 저녁.

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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