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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나물 봄동이 Sep 11. 2016

커피 혹은 술 혹은 다른 무엇

나는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이 매거진 속 이야기들은 제가 혹은 누군가 겪은 일에서 출발합니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저는 소설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커피 마실래요?
-아니, 안 마실래요.
 
분명히 안 마신다고 했는데 잠시 후 그는 커피 두 잔을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이거 마셔봐요. 진짜 맛있는 커피예요. 마셔보면 커피에 대한 생각이 바뀔걸요? 저기 골목 구석에 새로 생긴 카페인데 저도 여기 커피 한번 맛본 뒤엔 멀어도 여기 가서 사거든요. 제가 여섯 살 때부터 커피를 맛본 사람인데요, 여기 바리스타가…….
 
아까 커피 안 마실 거라고 했잖아요. 화내는 말투는 아니지만 다정하지도 않은 말투로 내뱉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나는 내 책상에 놓인 커피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일에 집중했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서 몇 달 전부터 같이 일하고 있는 그에겐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같이 영화 보자는 그의 말에 다른 약속이 있다며 ‘거절’했었다. 그 정도면 나의 뜻이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약속’이란 말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나는 그 주말 밀린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뒤에 집에서 영화 보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었으니까. 거절하면서 다시 약속을 잡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인 법인데. 얼마 뒤 그는 또 똑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고 그때의 나는 ‘싫은데요’라고 말했다. ‘커피 마실래요?’ 하는 그의 물음에 ‘전 괜찮아요’라는 식의 더 예의 있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진의를 파악하기엔 더 힘든 말 대신 ‘안 마실래요’를 택한 건 그래서였다. 그랬는데도 그는 날 위해 커피를 사온 거고. 날 위해, 라니. 날 위한답시고,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나는 거절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거절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그냥 내가 내뱉는 말 그대로 해석해주는 것. 그뿐이었는데, 그는 그마저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함께하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더 이상 그와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를 다시 마주한 건 한 카페에서였다.
 



-오늘의 커피 두 잔 주세요. 아이스로요.


‘바리스타가 웃는 인상이 좋네.’ 생각하며 주문하는데 그 바리스타가 날 빤히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커피, 이제 마시나 봐요.


아, 그였다. 커피, 이제 마시나 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때 그가 내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커피, 마시진 않았는데 치우려고 보니 보이지 않았는데, 그 식은 커피를 치운 건 그였을 거라는 확신이 문득 들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더 이상 내게 뭔가를 같이하자고 하진 않았는데, 아마 식은 커피를 버리며 어떤 마음도 함께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던 것이다.


-아, 오랜만이네요. 얼굴이 뭔가 달라지셔서 몰라봤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똑같은 거 같은데, 최근에 저 만나면 다들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구요. 더 잘생겨졌단 얘기도 듣구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얼굴에 빛이 나는 법이죠.


능글맞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환한 얼굴이어서 나도 기분 좋게 동조해 주었다. 내게 자신이 좋아하는 맛있는 커피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커피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앞으로의 꿈 이야기도 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내 귀에 닿지 않았던, 지금에야 그랬겠구나 싶은 그의 이야기. 




나는 내 대답과 상관없이 다가오는 그의 태도가 무성의함인지 서툰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의 진의가 무엇이든 내가 그에게 관심이 없단 사실은 변함없을 테니까. 더 깊어지지 않을 관계라면 단호한 게 서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프로젝트가 끝나고 바로 회사를 관두었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한 지는 반년 되었고,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만드는 커피 맛은 최고라고 했다. 그 얘긴 조금 전 M에게서도 들은 바였다.
 



-커피 마실래?
-그래. 같이 나갈까?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거절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M 앞에서는 언제나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다.


-뭘 굳이 둘이 나가.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이 사오기. 어때?


나는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가위바위보를 했고, 졌고, 이겨서 신난 M이 문을 나서는 내 등 뒤에 말했던 것이다.


-어디서 사올지 알지? 거기 커피 맛이 이 동네 최고라니까.

 



이 동네 최고라는 커피 두 잔을 건네며 그가 말한다.


-Y씨 입맛에도 맞아야 할 텐데, 살짝 걱정되네요. 근데 커피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우리 커피 다들 맛있다고 하더라구요.
-저기, 저 원래도 커피 마셨어요.

-아, 안 드시는 줄 알았어요.
-뭐 좋아하진 않았지만 마시긴 했었어요. 그땐 그냥... 그 커피는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었어요.
-아, 네. 여전하시네요.
-아, 네. 제가 좀.


우리는 이전보다 편해진 듯했다.


-암튼 커피 잘 마실게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가 물었다.


-근데 이 동네 사세요?
-아뇨, 친구 집에 놀러온 거예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반가웠어요.


문을 닫는 순간 왜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제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이 대단한 무기인 것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내가 진심이라고 해서 상대가 나의 진심을 받아줘야 할 이유도 없다. 아마도 M은 나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아, 그래서 그랬었구나. 그때 그랬던 건 그래서였구나. 뒤늦게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M은 나의 고백을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10년 우정은 10년에서 멈추고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10년 우정이 다른 빛깔로 변해 우리는 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이 비록 1%에 불과할지라도 있기는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MJ야.


이렇게 이름을 부를 땐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M도 알고 있다. 만화책을 읽던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이전에도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했었지만
지금 나올 말은 그때와 다른 온도와 무게를 지녔음을 M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커피든 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메타포일 뿐이다. 커피 마실래요? 술이나 한잔할래? 다 같은 의미다. 나는 당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하는. 


지난 10년간 끊어질 줄 알았는데 안 끊어진, 끊어졌다가도 다시 이어지고 만 내 마음이 입을 열었다.


-이번주 토요일에 뭐해? 같이 술이나 한잔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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