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살이 되던 해에 나는 잘 다니던 일터를 옮겨 남해로 갔다. 내 결정으로 인해 온 가족이 본집과 남해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 했고, 딸은 정든 친구들과 익숙한 동네 라이프를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교생이 1100명 정도 되는, 코로나로 인해 원격수업이 더 많고, 방과 후 수업도 추첨을 통해 수강 여부가 결정되던, 아파트 바로 옆 학교에 다니던 딸은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의 남해 서면 작은 학교의 39번째 학생이 되었다.
완전히 이사하지 않고 타 지역에서 건너온 전입교사와 전학생이 된다는 건 불편함을 감내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곧 알게 되었다. 남해에서 새로 구한 집은 작았다. 그래서 원래 살던 집과 남해 집을 반반씩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옷도, 책도, 생필품도 큰 짐가방에 넣어 챙겨 다녀야 했다. 등하굣길도 집 앞 도보 3분이 아닌 본집에서 1시간, 남해 집에서 10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했다. 빨라진 아침 기상 시간에 긴장한 건 기본이고, 운전이라곤 10분 이상 해볼 일 없던 나는 딸과 함께 내비게이션을 붙들고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때때로 세트 의류 상의는 본집에 하의는 남해 집에 있는 난감함을 맛보았고,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은 딸의 외투가 더러워져 야밤에 급속건조가 가능하다는 코인 빨래방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오리털 파카의 급속 건조 결과는 8,000원을 탕진해도 눅눅함이 남았고, 다음날 딸은 엄마의 가장 작은 외투를 입고 소매를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안으로 말아 넣어 등교해야 했다.
맞다. 우린 사서 고생을 했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왜 때문에? 묵혀온 과제를 안고 살던 나의 즉흥적 선택 때문에. 나는 남편과 딸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나의 과제는 내 몫으로 최대한 끌어안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은 더더욱 ‘의미 있게’ 보내리라 다짐했다.
<달라진 삶, 달라진 하루>
우리 가족은 난생처음 접하는 다양한 난감한 상황 속에서도 남해 생활의 긍정적인 면과 새로운 기회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생활 속 불편함을 투덜거리기보단 그 불편함이 주는 교훈을 귀 기울여 들으려 했다.
집이 좁아 답답하다면 집 밖의 바다를 마주하러 나가고, 깔 맞춤할 옷의 짝이 맞지 않다면 스티브 잡스처럼 심플한 스타일로 패션에 쏟던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여보며, 길어진 이동시간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딸의 영어 흘려듣기 시간으로 활용했으며, 남해 지도를 구해 퇴근 후 가까운 거리의 맛집, 산책로, 유명 관광지 등을 다니며 추억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벌써 우리 가족이 남해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불려지고, 아이들이 선생님 품에 와락 안기는 작은 학교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었다. 꿈꾸는 듯 빛나는 유채꽃을 봄 내내 보았고, 벼와 시금치가 얼마나 예쁘게 자라는지 매일 관찰할 수 있었으며, 가을 논에 볏짚단을 하얀 비닐로 말아둔 대형 마시멜로 위에서 만세도 외쳐보았다. 또 종종 바닷가에 앉아 바다를 눈에 담으며 샌드위치 등 저녁을 먹었고, 패러글라이딩 체험으로 남해의 하늘을 날아보았으며, 남해읍 골목길 곳곳에 그려진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딸은 마음을 열고 많은 경험을 쌓아갔고, 불편함이 주는 교훈을 통해 의젓한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셀프 유배를 떠나온 교사 엄마는 유배지에서 딸과 함께 소중한 하루하루를 꽃피우는 행운을 얻었다.
<자녀의 삶에 밑거름이 되는 영광>
결혼 이후 십수 년 만에 겪는 환경의 변화는 내 삶의 방식을 점검해 보도록 만들었다.나 자신으로, 엄마로, 선생으로 살아가던 '당연한 나'를 새로운 시선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는 늘 바쁜 것 같았다. 늘 가득 차 있으므로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때로는 작은 것에 예민해지고, 그 작디작은 것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었다. 나의 삶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우왕좌왕할 때,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남편은 담담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은 덜어내고 본질과 가치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나의 성찰이, 나의 성장이 자녀의 삶에 밑거름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한다. 교육을 삶으로 이어오던 엄마는 딸과 함께 꽃 피우는 행운의 시간을 통해 교육학 서적에서 찾을 수 없던 자녀 교육에 대한소중한가치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 가치 덕분에 이젠 어느 곳에서라도 삶의 즐거움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우린 정말 바쁘기만 할까요?>
퇴근 후 30분 또는 주말 1-2시간. 길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의 추억 속에서 영원히 빛날 추억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빠르게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에 휩쓸려 흐르지 않으려면 삶 속에서 가치의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한다. 남해라는 공간이 나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 것처럼, 나의 글로 인해 - 내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가치의 닻을 굳건히 내리고 풍요롭게 성장하는 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