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 관성>
학교는, 교실은 ‘자율’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일률’적 교육활동의 유혹이 참 많은 곳이다. 매 순간을 깊이 보지 않으면 긴 시간 이어져 내려온 관성이 우리를 한 줄로 세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학교 현장에서 평소 자율의 참 의미대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옆 반 선생님께서 자발적으로 교실 문을 열어주셨다. 감사했다.
<나의 느티나무 수업>
‘나의 느티나무 프로젝트 수업’은 아이들이 ‘내가 사는 마을을 알아가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설계된 수업이었다. 2학년 아이들은 2학기 시작 무렵부터 반 친구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모두 탐방하기 시작했었다. 8명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6개의 마을이 위치한 남해군 서면에는 큰 느티나무가 많다. 아이들이 오가는 길에 늘 함께한다. 그래서 '나의 느티나무'라는 프로젝트 이름이 붙었구나 싶었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푸른 들판을 품은 남해의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기가 흐르는 마을을 신나게 누비고 다녔을 아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보물치’를 닮은 생기 있는 에너지가 내 마음속에 차올랐다. (보물치는 보물섬(남해)의 시금치를 1학년 우리 반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수업을 시작하며 '친구들이 사는 마을에 갔을 때 기억에 남는 것'들에 대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닷 가서 놀았던 것,
편의점 젤리뽀를 사 먹은 것,
강아지를 본 것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 모습에서 이미 프로젝트 수업은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동네 곳곳에 추억을 새겼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 반대는 없다>
무조건 반대는 없다.
어떻게 하면, 함께 할 수 있을지
제안해서 함께하기.
2학년 교실 한쪽 보드에 늘 붙어있는 문구다. 멋진 말이다. 그러나 늘 궁금했다. 9살의 삶 속에 저 멋진 말이 어떻게 스며들 수 있을까? 스며든 모습은 어떨까?
오늘은 6개의 마을 중에서 현준, 준우, 민찬 3명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예계 마을’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날이다. 수업은 ‘1. 마을 소개 - 2. 질문 - 3. 상상씨앗(예계 마을에서 해보고 싶은 일) - 4. 설득 - 5. 투표 - 6. 결과 발표 - 7. 주먹오 공감 - 8. 제안’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유심히 살펴보면 ‘함께’라는 학급 철학이 녹아든 수업의 흐름이었다.
바닷가에서 놀았다던, 젤리뽀를 사 먹었다던 아이들은 예계 마을에서 ‘술래잡기, 뱀 찾기, 바닷가 달리기, 자전거 타고 위험 지역 가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남해의 아이들답게 자연과 맞닿아있는 상상이었다.
수업의 단계 중 특히 '7. 주먹오 공감' 단계가 인상 깊었다. 우리의 손가락으로 표현할 수 있는 0~5 사이의 숫자를 이용해 내가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원하는지 등을 나타내는 활동이었다. 우리는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OX로 대변되는 흑백 논리에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주먹오 공감은 0~5 사이 손가락 개수를 이용해 다양한 생각을 품는 - 열린 사고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수업 사이사이 ‘무조건 반대는 없어.’라고 말하는 아이, ‘무조건 5는 있어.’라고 말하는 아이, 손가락 2개 혹은 3개를 높이 든 아이들의 모습에서 다소 어려운 듯한 2학년 학급 철학이 아이들 속에 스며든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업의 끝이 단편적인 사실들과 생각들의 정리가 아닌 ‘제안’이라는 열린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 좋았다. 제안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질 테니.
<선생님의 단어>
수업의 시작은 싱잉볼(Sining Bowl) 소리와 함께였다. 싱잉 볼 소리에 아이들은 허리를 쭉 펴고 짧은 명상을 했다. 선생님께서 “행복했던 기억, 감사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경건함이 귀여운 모습으로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수업 끝에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마을에 대해 설명한 것, 앞으로 마을에서 해 보기로 제안한 일들에 대해 ‘기대, 재미. 설렘’ 등의 단어를 이용하여 수업을 마무리해 주셨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싱잉볼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수업을 시작할 때 ‘행복, 감사’라는 단어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행복, 감사, 기대, 재미, 설렘
2학년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밝고, 긍정적인 설렘이 묻어나는 단어 역시 아이들을 행복함과 감사함, 설렘 에너지로 감싸 안으며 아이들 속에 어떠한 형태로든 스며들었으리라.
놋쇠 그릇처럼 생긴 싱잉볼(Sining Bowl)을 잠시 바라보며 수업도 '노래하는 그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노랫소리가 따스했던 오늘 수업 한 그릇에 선생님과 아이들은 무엇을 담아내었던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마을 어귀 느티나무처럼 마음에 품고 살아갈 추억을 만들고 싶다.’ 하시던 2학년 선생님 말씀처럼 ‘수업도 추억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한 그릇의 수업 속에 ‘함께한 추억’이 몽글몽글 김을 내며 담겨있음을 보았다. 참 따스한 수업이었다.
<명확한 방향>
'함께'의 가치를 담은 확고한 학급 철학과 따스한 교사의 말이 갖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가치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돌아다니는 교실에서 그 모든 것들을 붙잡고자 애써본다.
하지만 '이것저것 열심히 하다 열심히 끝나는 한해'가 싫어서 한 가지를 정해서 쭉 밀고 나가신다던 2학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교실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그려보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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