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에필로그 순천의 갈대
여수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우리의 에필로그 여행을 시작했다.
바로 순천.
순천만의 정원축제는 이미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갈대를 볼 수 있는 시기였기에
그 드넓은 갈대밭을 보기 위한 여정이었다.
사진에서만 만났던 순천은 어떤 곳일지 두근대는 마음이었다.
순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순천만 가는 길 한정식을 찾아갔다.
시골 길목에 자리 잡은 이곳은 마당 한편에 향기로운 모과가 열리고 있었다.
노랗게 익은 모과가 나무에 달린 것을 보는 일이 얼마만인지.
항상 거실 한편에 놓여 있던 것만 봐왔는데 말이다.
정겨운 풍경이 꼭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때마침 식사시간이어서 그랬을까. 여러 상차림이 있었지만, 가장 거한 한상차림을 시켰다.
그런데 과했나 보다.
아침 조식도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먹은 이 한 끼가 나중에 문제가 될 줄이야...
그때는 맛있게 먹었지만, 기름진 음식들이 속을 불편하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엄마는 조금 버거워하셨다.
사실 거하게 시킨 것은 내 욕심도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가는 길 뭔가 기억에 남는 대접하고 싶었던 욕심.
뭐든 과하면 안 되는구나를 깨달았다.
음식들은 정갈했고 맛도 좋았지만, 단지 우리에게 과했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드디어 도착한 순천만은 광활한 느낌이었다.
밖에서 바라보는 데도 그 자연이 주는 웅장함이 느껴졌달까.
입장권을 사려고 보니,
역시나 이곳은 하루 만에 볼 수 있는 코스가 아닌듯했다.
이틀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들도 판매되고 있었으니까.
우리에겐 어차피 짧은 시간만 있었던 관계로 기본 갈대밭만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매했다.
순천만 정원.
이걸 못 보고 온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정말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였으니까.
5월 정원이 절정에 이를 그때에 한 번 가보고자 했지만, 여태 움직이지 못했다.
시기를 늘 놓치기 일쑤다.
아직도 그 미련은 그득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정원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오리라 생각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들에는 나름 볼만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무심히 지나쳤다.
오직 갈대밭을 보자 하는 마음.
그렇게 안쪽으로 걸어 걸어 드넓은 갈대밭을 드디어 만났다.
가을 햇살에 빛나는 갈대가 펼쳐진 광경을 장관이다.
눈을 돌리는 곳곳이 찬연하다.
살짝은 져가는 갈대였지만, 그렇게 펼쳐진 광경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도 걸어도 어디에서나 보이는 이 갈대의 천국에서 우리는 아쉬워서 더 기억에 각인된 추억을 만들었다.
순천은 온통 갈대로 기억한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느리게 흐르는 듯한 시간을 느꼈다.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내리워지는 광경마저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그날,
완연한 아름다움은 조금 지고, 가을의 마지막을 보내기 전 만났던 이날의 갈대밭은 아쉬움이었다.
조금 더 활짝 핀 갈대밭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움은 다시금 오고 싶다는 열망의 작은 씨앗을 남긴다.
푸른 하늘과 노랗게 펼쳐진 갈대밭 그리고 그 사이사이 흐르는 강..
그 광경이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다시 셋이 되어 함께 하고 싶다.
여수가 온통 푸르름에 덮여있는 에메랄드의 물결이었다면, 여행의 에필로그로 만난 순천은 황금빛 물결과도 같은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더 풍성한 즐거움을 남겨준 순천이었다.
원래 본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이 에필로그가 아니던가.
살짝 기대하지 않고 갔던 순천은 더 큰 감동의 에필로그를 남겼다.
왠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온 듯한 기분.
장소가 주는 다름이 아니라 색감이 주는 다름을 만끽한 그 마지막 여행지는 편안함이었다.
푸르름에 취해서 들떠 있던 마음이 갈색으로 물든 땅을 바라보며 휴식하고 안정되는 것 같달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음을 조금 더 평온하게 했다.
여수를 떠나 마음 그득했던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행복한 그때의 기억.
그 기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그날을 다시금 떠올리는 지금.
떠나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이 들썩거린다.
나는 올해는 다시 이곳을 만날 수 있을까?
내 계획안에 언제나 있는 이 여수를 순천을 올해는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기분 좋은 웃음이 나는 순간이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나의 무언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을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여행을 많이 하면 난 더 넓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오면서 나는 여행이 주는 경험이 나를 더 크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저, 삶의 하나의 추억이 되어 살아갈 날들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나 스스로 정의 내렸다.
문득 힘든 날이면 나도 모르게 아 그때 좋았지 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나마 그 희미해진 순간을 떠올릴 때,
아주 작지만, 살아갈 힘을 얻는 나를 발견했다.
멀리 갔던 여행도, 가까운 곳에 머물렀던 여행도 동일하게
나를 다독여주는 순간을 선사한다.
그 순간들 덕에 나는 살아간다. 숨을 쉰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다.
그 순간을 만든 기억들을 다시 하나하나 떠올려보기 위한 첫 여정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시작된 여정이 오래오래 쭉 이어지기를..
나 스스로 다짐하고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