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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흥을 풀다

by 꿈꾸는 나비


일상이 지루해진다 싶을 땐 안 하던 것을 해보는 게 좋다. 그중에서도 시도하기 쉬운 것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나는 예전부터 내 안에 깊이 감춰둔 흥을 찾아 꺼내고 싶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감춰둔' 게 아니라 '봉인된' 흥이라고 해야 맞겠다.


초딩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잼의 <나는 멈추지 않는다>를 녹음해서 언니랑 얼마나 열심히 춤 연습을 했었는데!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로 얼마나 반쪽을 갈랐는데! 초딩 소풍날 장기자랑 시간,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로 얼마나 엉덩이를 살랑거렸었는데! 그런 내가? 뚝딱이? ㅋㅋㅋ


나는 멈추지 않는다(간지나는 제목)

사실 대학교 때 가끔 찾아가던 나이트에서 현란한 조명 아래서 내 몸짓이 가려지는 걸 얼마나 감사했던지. 사실 알고 있다.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정말 진짜 몸치, 박치, 로봇이 저리 가라면 섭섭할 테지. 아니, 로봇보다 못하다. 요즘 로봇은 춤도 잘 춘다더라.


자전거를 같이 타면서 알게 된 언니가 셔플댄스를 추는데 너무 신나 보였다. 지나가듯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재밌겠다 싶었다. 오십 대인 언니도 이제 겨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는데, 나이 핑계는 애초부터 꺼낼 수 없는 카드였다. 언니가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겠나.


나도 흥이 많아 몸을 둠칫둠칫할 때가 많지만, 정식으로 춤을 배워보자는 마음을 접은 게 이십 대 때였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가 흥행할 때쯤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방송댄스를 같이 배워보자며 찾아간 그곳에서, 나의 몸이 상당히 고장 났다는 걸 깨달은 이후 '다시는 춤을 배워봐야지' 하는 생각은 쏙 들어갔다. 그게 거의 이십 년 전이다.

소원을 말해봐 (춤신이 되고 싶어요!)

지금에서야 왜 다시 춤일지 모르겠지만 늘 춤추는 걸 좋아하는 딸을 곁에 둔 덕분인지 나도 춤을 잘 추고, 게다가 춤선이 예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케데헌 노래 중 '소다팝' 춤처럼 유행하는 춤 한 구절씩 센스 있게 추면 얼마나 멋질까. 전에 넌지시 춤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아직 있다고 털어놨던 게 언니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회사 근처에 언니가 배우던 선생님이 새로운 클래스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전거 타다가 발목 부상이 온 지 일 년이 넘어, 조금씩 러닝머신 위를 걷고 뛰며 발목 단련을 하던 차인데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몸치라 내가 왜 셔플댄스를 할 수 있겠나 싶기도 했다. 이 마음의 진자운동이란.


일단 당장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너무 경험이 없어서 고민이 된다고 털어놨더니, 언니는 체험을 먼저 해보고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특별 케이스로 첫 수업에 체험으로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전날 선생님이 미리 출석체크를 하며 "이번에 새롭게 클래스 오픈하는데 연령대가 좀 있어요. 대부분 오륙십 대이고 사십 대가 서너 명뿐이라 괜찮으시겠어요?" 하셨다.


춤은 젊은 사람만 추는 거 아니냐는 은근한 선입견이 올라오면서 내 나이는 또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나는 내가 가면 제일 나이가 많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거의 막내뻘이라니. 엄마가 가는 복지회관에서 라인댄스를 배우는 그런 분위기면 어쩌나, 한번 체험하고 그만둔다고 해버릴까 보다 생각하며 첫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 시작 시간은 저녁 6시 30분. 퇴근 시간과 차이가 있어서 계획 없이 나와버린 탓에 조금 방황했다. 괜히 가방이 무거우면 안 된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책 한 권 가져오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웠다. 시간을 아무 데서나 때우고 핸드폰을 하면 되지만, 미리 계획하지 않으니 역시 우왕좌왕이다.


시간을 때우는 건 역시 먹는 거지. 지나치던 떡볶이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앉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쫀득쫀득 쌀떡이 입에 착착 붙는다. 아, 나 저녁에 적게 먹고 다이어트하기로 한 사람이지... 먹는 거 앞에서는 타협이 정말 안 된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나는 먹고 있으니, 다이어트란 녀석이 성공하기는 글렀다. 뭐, 곧 춤추러 가는데 미리 칼로리 충전이라고 생각하자.




어쨌든 시간을 먹는 걸로 때우고, 처음 수업이 열리는 낯선 장소를 향했다. 뭐든 처음은 두렵다. 긴장되고 낯선 곳에 나의 몸을 구겨 넣을 때의 서늘함이란. 수업 십 분쯤 남겨두고 들어갔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머리가 희끗희끗, 역시나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었다. 아휴, 어제 예고한 그대로구만 하고 들어갔다.


공간 뒤쪽 일렬로 늘어놓은 의자 중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 앉고 수업 시간을 기다렸다. 아직 몇 분이 안 오신 듯했다. 뒤늦게 여성 한 분이 내 옆으로 쑤욱 들어오시길래 무심결에 옆에 둔 가방을 무릎 위로 옮겨 놓았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하며 방긋 웃는 얼굴에 나도 따라 웃었다. 낯선 곳에서 말문 트일 곳이 생겼나 싶어 괜히 반가웠다.


가볍게 "처음 오셨어요?" 인사를 나누고, "완전 처음이고 몸치라 걱정돼요~" 너스레를 떨었더니 "자기는 삼치"라며 깔깔 웃으신다. 잠깐, 삼치? 춤치, 몸치, 박치가 아니라 삼치? 세 가지 다 치라는 거구나! 어버버 하며 웃던 그 순간, 수업이 시작됐다.


모르는 사람들, 연령이 다른 사람들 속에 나는 서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거울이 왜 이리 얼룩덜룩한지. 엉성한 내 몸짓이 또렷하게 안 보일 거란 생각이 드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셔플댄스 기초가 시작되었다.


기본 몸풀기가 길게 이어지고, 그다음은 다운 리듬, 업 리듬, 그리고 발 동작이었다. '런닝맨'이라 부르는 셔플의 기본기 동작이었다. 큰일 났다. 벌써 스텝이 꼬이는데 나만 그런가 싶어 옆을 슬쩍 보니 다들 제법 따라 하고 있었다. 에혀, 긴장되네. 그래도 순서를 따라가고 있었다. 뚝딱거리면서도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음악이 신났다. 경쾌했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좋았다.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 게 좋아 빠져들었던 등산이나 자전거처럼 나는 그 춤에 빠져 있었다. 쭉 이어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준비도 없이 왔다가 제법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갈아입을 옷도, 물도 없이. 나란 사람의 준비성이란... 뭐, 대충 하려 했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생각보다? 아니 진짜? 재밌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소개해준 언니에게 "너무 재밌어요!" 하고 피드백을 날렸다. 언니는 이런저런 조언을 보태며 재미있게 배워보라고 응원해 주었다.


보내준 영상을 보고, 춤꾼 딸과 함께 주말에 셔플 기초 스텝을 연습해 보기로 했다. 한 주의 한 번, 유쾌한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안 해본 것에 대한 신선함, 이것이 안겨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한다. 삶의 활력소라는 게 이런 걸까 생각해 본다.


매주 화요일, 셔플댄스 수업 날이다. 총 10번의 수업으로 마스터가 가능하다는 셔플댄스의 시작. 첫 수업은 점프점프, 바운스바운스, 업 앤 다운 리듬을 듣고 타는 시간이었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너무너무 즐거웠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진도가 조금 더뎠다. 지난번에 이어 런닝맨 스텝을 다시 연습하고, 이어서 크랩 스텝(브이 스텝)까지 배웠다. 동작이 늘수록, 속도가 빨라질수록 스텝이 꼬이는 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아, 이놈의 몸치. ㅋㅋ


주말 동안 런닝맨 스텝 연습하겠다고 호기롭게 영상을 틀고, 춤 좋아하는 딸내미를 꼬셔서 스텝을 밟아봤다. 그런데 수업 때보다 더 버벅댔다. 딸은 웃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집중이 안 된다. "너는 금방 배우니까 엄마 좀 가르쳐줘" 했더니, 이 아이는 설명이 하나도 필요 없다. 그냥 된다. 뭐야, 왜 그냥 돼? 유전자는 어디 가고?


나는 단계별로 끊기고 로봇 저리 가라 수준인데, 연속으로 해보자니 오징어처럼 휘청휘청이다. 폼이 하나도 안 나잖아. 안 되는 일에는 흥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아이고, 이래 가지고 무슨 댄스를 하겠다고. 뚝딱거리는 엄마 옆에서 폴짝폴짝 동작 몇 번 하던 딸은 이내 소파에 널브러지고, 나만 남았다. '에라이, 나도 재미없다' 하고선 춤 연습은 삼십 분도 채 안 했는데, 실감상으로는 몇 시간은 헤맨 기분이다.


엊그제 수업에서는 나만큼이나 뚝딱이는 어르신들이 많았는데(사실 어르신들이라 위로가 하나도 안 된다 ㅋㅋ), 선생님은 "무조건 이 동작 되게 만들 거예요. 책임지고!" 하며 웃으셨다. 글쎄요... 내 속마음을 읽으신 건가. 자꾸 눈길을 주며 내 동작을 봐주시는데 그저 함박웃음이시다. 으으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고요. 그 미소 속에 담긴 '아이고, 이 학생'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음만은 제니


연말에는 파티를 하자는데,

열 번 배우고 작은 무대 위로 올라가 보자는데?

네??

우야든동 되겠지.

다음 주 화요일에도 열심히 뚝딱 여보자.


나는 하면 잘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니까.

아자자자자자자-

(이 주문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아닙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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