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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다정하게 걸어라

by 꿈꾸는 나비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을 읽다가 어떤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저절로 느려지고,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런 문장이었다.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를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이 문장이 진짜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한 말인지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진짜 출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삶의 태도가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빛바랜 듯하지만 결코 색이 바래지 않는 진실처럼 말이다.


우리는 늘 '그때'를 기다린다. 승진하고 나면,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이사를 가고 나면, 그때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또 다른 '그때'를 찾아 나선다. 행복은 언제나 수평선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그런데 이 문장은 우리에게 말한다. 행복은 언제나 '그때'나 '저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있다고.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고, 그 삶이 곧 행복이라고.



그리고 그 문장은 한 가지를 더 일깨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도 늘 웃고 있는 사람도 저마다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것. 지하철에서 마주친 무표정한 얼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손님,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타는 이웃. 우리는 그들의 삶을 모른다. 오늘 아침 어떤 일로 눈물을 흘렸는지, 어떤 걱정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지, 어떤 슬픔을 삼키며 하루를 시작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두가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동정이 아니다. 연민도 아니다. 이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여정을 걷는 동행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작은 다정함으로 누군가를 되려 위로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위로를 받게 된다. 힘든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 다정하게 위로하며 지내자는 것.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이고 공동체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소설 속 노숙자 독고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가진 것이 별로 없다. 편의점에서 밤새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간다. 서울역에서의 생활보다는 훨씬 나아진 삶이다. 누군가의 다정함이 사람의 삶을 이렇게 바꿔놓기도 한다. 물론 그 다정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중요하다. 독고씨는 힘들었지만 아주 삶을 포기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누군가의 손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을 끊으면 마치 세상이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이거 마셔요, 옥수수수염차. 몸에 좋아." 단 한 줄. 그런데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괜히 마음이 풀리고 웃게 된다.


왜일까. 그의 말투에는 억지 위로나 과장된 다정함이 없기 때문이다. 값싼 동정이나 거창한 충고도 없다. 그냥 사람을 향한 따뜻한 체온 같은 게 느껴진다. 겨울날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온기. 독고씨의 말에는 그런 체온이 있다. 대화할수록 묘하게 마음이 녹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는 있다. 그들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위안이 된다.



『불편한 편의점』의 에피소드마다 결국 그걸 말해주는 것 같다. 삶은 거창한 희망이나 큰 목표보다 오늘 하루의 작은 친절과 다정함으로 이어진다고. 편의점에 들어서는 손님 하나하나 그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 하나하나가 모여서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한다고.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멈춰 서서 고민한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아예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멈추는 게 아니라 계속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걸음에 조금 더 다정함을 담아서.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주치는 눈빛에, 우연히 오가는 말 한마디에 작은 온기를 실어서. 행복은 목적지에 있지 않다. 길 자체가 행복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다정함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친절하게, 조금 더 따뜻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어본다. "멈추지 말고, 다정하게 걸어라."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같은 길을 걷는 모든 이에게 건네고 싶은 인사다. 우리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로에게 다정해지자. 길은 멀고 때로는 힘들지만 우리는 함께 걷고 있으니까. 길 위에서 만난 누군가의 미소가 건네받은 따뜻한 차 한 잔이, "괜찮아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어쩌면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길은 계속된다.

멈추지 말고, 다정하게 걸어가자.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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