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결국, 관계를 통과하며 자란다
가끔 내 주위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름은 많다. 얼굴도 많다. 웃음도, 기억도, 여럿 있다. 그런데 마음속 빈자리 하나가 조용히 빛을 잃지 않고 남아 있다. 그 자리에 누구를 앉혀야 했을까. 혹은 누구도 앉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였을까. 이 질문은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는 행위에 가깝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예상치 못한 빈칸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 빈자리는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내 주변은 이렇게 채워졌다. 산길을 함께 오르며 숨을 섞어낸 사람들, 오래된 시간 속에서 이름으로 남은 친구들, 멜로디 위에 잠시 내려앉은 인연들, 같은 관심사 하나로 어깨를 기대었던 사람들. 분명 소중했다. 그 순간들은 참 따뜻했다. 인연은 늘 그렇게 찾아왔다. 이유도 예고도 없이. 어떤 만남은 우연처럼 시작되어 필연처럼 깊어졌고, 어떤 만남은 필연처럼 시작되어 우연처럼 흩어졌다. 그 모든 순간이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채웠다. 웃음으로, 대화로, 침묵으로.
꽉 찬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한 칸이 비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름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만히 다시 자리를 정렬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치 책장을 정리하다가 어느 책이 그곳에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처럼 분주하던 손이 멈춰버린다. 가끔은 빈자리가 더 선명하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보다 이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또렷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상실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이다.
요즘 나는 내 시간을 먼저 붙잡는다. 딸과 전적인 시간을 나누는 주말, 글 앞에서 호흡을 맞추는 새벽. 그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멀어진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소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조금씩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를 지키려다 자신을 놓치는 대신 몇몇을 놓아주면서 자신을 붙잡는 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빈자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아니, 두려워하면서도 견디는 것.
사람은 결국, 관계를 통과하며 자란다. 만남으로 배우고, 이별로 깊어지고, 빈자리 앞에서 단단해진다. 그래서 잃음도 성장이다. 누군가를 보내는 일이 나를 비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선명하게 채우는 과정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설명해도 닿지 않는 사정들, 가볍게 붙는 이름표, '바쁜 사람'. 그 말 한 줄이 내 마음을 종종 아주 조용히 긁고 간다. 괜찮다가도 조금은 아프다.
어떤 날은 드라마가 부럽다. 어릴 적부터 언제나 곁에 있는 얼굴들.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평생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런 인연은 내게 없었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걸까. 그 자리를 향한 내 갈망은 사람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확실한 존재이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우리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욕구는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혼자서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가끔은 전화기를 들고 누구에게 먼저 연락할지 고민하는 그런 밤이 온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전화를 걸지 않고 그냥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인연은 새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가고 어느 계절에선 가만히 머물다 간다. 그 자리엔 언제나 작은 훈기가 남는다. 그 따뜻함 하나면 충분한 날이 있다. 어쩌면 그 훈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빈자리가 있어도 괜찮다. 그 자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공간이든 그저 비어 있어야 할 여백이든, 중요한 건 그 빈자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흔들리게 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일이다.
오늘의 빈자리는 내일의 나를 만드는 자리다. 비어 있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빈 공간이 나를 더 넓게, 더 깊게 만든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 혼자서도 설 수 있는 힘, 다시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그 모든 것이 빈자리에서 자란다. 나는 붙잡지도, 억지로 보내지도 않는다. 그냥 지켜본다.
흐르는 건 흘러가고, 남는 건 남는다. 마음도, 사람도, 시간도 그렇게 흘러서 모양을 만든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계속 나를 잃지 않고 서 있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빈자리를 메우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를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내 속도로, 내 방식으로, 이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관계를 통과하며 나는 자란다. 잃음을 통과하며 나는 깊어진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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