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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by 꿈꾸는 나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오래전에 멈춰 있었던 지점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듭 읽을수록 이상하게도 ‘엄마의 유산–우주의 핵은 네 안에 있어’를 쓰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오래 닫아두었던 서랍이 열리듯 깊숙이 넣어두고 자주 꺼내보지 않았던 혼란한 마음을 슬쩍 꺼내보았다. 그때의 공기가 고스란히 주변을 감싸고 돈다.


올 상반기 나는 딸에게 편지를 쓰는 공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리더는 은근히 ‘아픔의 서사’를 끌어내려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맴돌았다. 정말 내 아픔을 꺼내지 않으면 글이 성립되지 않는 걸까?


내가 가진 정신을, 내가 살아온 지혜를 물려주기 위해선 마치 상처를 보여주는 방식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 그 힘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진실한 고백’의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고통을 증명해야만 진정성이 인정받는다’는 오래된 관성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가던 시기였다. 딸과 떨어져 지내는 현실도 차분히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름의 평온을 되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다시 그 이전의 나로 불려갔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이미 정리했다고 믿었던 감정의 골짜기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나는 그것이 또 다른 방식의 휘둘림이었음을 이제야 인정하려고 한다.


니체는 말했다. “자기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자는 복종해야 한다.” 그 말이 내게 다시 날아와 꽂힌 건한때 남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내 감정의 방향을 다시 꺾어버렸던 나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복종했다. 내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를 냈다. 내 진짜 마음이 아닌 ‘그럴듯한 감동’을 생산해내려 애썼다.


나는 정말 어떤 마음에서 그 글을 썼던 걸까? 내가 선택한 목소리는 내 것이었을까 아니면 필요한 역할에 맞춰 편집된 나였을까?


이 질문은 나를 부끄럽거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다시 중심으로 데려오는 질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꺼낸 상처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온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를 내가 진짜 믿고 살아온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더 깊숙이 살피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글을 쓸 때 내 안쪽에서 나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려 한다. 누군가가 원하는 감정의 결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끌어다 쓰지 않겠다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말의 속도를 내가 결정하겠다고 또렷하게 다짐하고 싶다. 느리지만, 언제나 내 심장의 리듬에 맞춰서.


결국 답은 없어도 길은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쪽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제 내 안의 나침반을 믿기로 한다. 남들이 기대하는 쪽이 아니라 내가 향해야 할 진짜 방향을 가리키는 그 떨림을.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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