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아무리 되뇌어도 세상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이 차가운 진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아는 것’과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아득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성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성장이란 단순히 어제보다 나아지는 근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세계를 기어이 깨뜨려야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대개 마음속으로만 성장하고 싶어 한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언젠가는 달라지고 싶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은 안에서 흔들린다고 해서 저절로 깨지지 않는다.
알 껍질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선택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자기 경험’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경험’이란 단순히 내게 일어난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벌어진 일 위에 나의 사고(思考)가 덧입혀질 때, 사건은 비로소 경험이 된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떤 날은 아무 흔적 없이 증발하고, 어떤 날은 오래도록 마음에 고인다. 그 순간을 그냥 흘려보냈는지, 아니면 잠시 멈춰 서서 붙잡아보았는지의 차이다.
늘 곁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상황이라는 바다에 ‘사고라는 그물’을 던졌을 때만 무엇이 내 것인지 비로소 알 수 있다.
• 왜 이 장면에서 멈춰 섰는지.
• 왜 이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는지.
• 왜 이 선택 앞에서 망설였는지.
질문을 던지는 순간, 스쳐 지나가던 찰나들이 그물에 걸려든다. 그제야 나는 그것을 품어보고 내 삶의 일부로 만든다. 이렇게 길어 올린 경험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늘 같은 불편함으로 돌아오는 순간, 혹은 계속 외면해 왔던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는 지점.
아마 그때가 알에 금이 가는 순간일 것이다.
알을 깨는 도구는 거창한 결단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되풀이된 경험 속에서 단단해진 사고, 충분히 사유했기에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는 임계점의 산물이다.
결국 성장은 누적된 사고의 결과다. 알을 깨기 위한 몸부림은 때로 처절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익숙하고 안전했던 세계를 스스로 부수는 일은 결코 안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터널 같은 과정을 지나야 만 한다.
나는 오늘도 문장을 따라 걷는다. 곧바로 태어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삶을 무력하게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고의 그물로 하나씩 건져 올릴 뿐이다.
언젠가 그 조각들이 모여
내가 머물던 세계에 조용히,
그러나 확실한 금을 내주기를 바라며.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