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책은 날 위로하지 않지만, 나의 세계를 넓히기에

by 꿈꾸는 나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두꺼운 책을 스스로 집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점의 평대에 놓인 소위 ‘벽돌책’들을 볼 때면 경외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두께, ‘저걸 언제 다 읽지’라는 막연한 거부감. 내게 벽돌책은 언제나 넘지 못할 담벼락이었고, 지적인 과시욕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벽돌책 독서 모임은 일종의 비겁한 타협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열어보지 않을 세계를 타인의 눈동자를 빌려 억지로라도 통과해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는 <코스모스>를 거쳐 <총, 균, 쇠>를 지나, 지금은 <판타 레이>의 파도를 탔다.


우주를 훑고, 인류의 기원을 지나, 과학 혁명의 계보를 따라가는 이 여정은 솔직히 버거웠다. 완독 한다고 해서 모든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책장을 덮고 나면 휘발되는 지식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는다. 내가 그 거대한 한 권을 끝까지 통과해 냈다는 감각과 내 안의 무엇인가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책 한 권에서 단 하나의 메시지만 건져 올려도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책 전체를 완벽히 삼키지 못하더라도 묵직한 문장들이 내 평온한 사고의 수면을 티끌만큼이라도 흔들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요즘 나는 묘한 흐름 속에 있다. 깊은 과거를 건너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고, 이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삶의 현장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주식 투자를 공부하며 마주한 ‘기술’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숫자가 아닌, 수천 년간 인류가 던진 질문과 실패의 축적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독서와 미래를 고민하는 투자가 묘하게 맞물리며, 나는 지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연결하는 근육을 키우고 있음을 느낀다.


벽돌책 들기처럼 평소에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 것은 글쓰기에 대한 갈증에서도 시작되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늘 비슷한 경험담과 뻔한 자기반성의 테두리 안에서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쏟아낼 수 있는 말이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 내 세계의 밑천이 바닥났다는 답답함. 작가처럼 쓰고 싶다면서 오직 내가 겪은 좁은 세계만으로 성채를 쌓으려 했던 건 아닐까.


내 경험은 글의 작은 재료일 뿐, 세계관과 구조를 만드는 건 결국 켜켜이 쌓인 타자의 사유다. 지금 나는 물이 차오르기 전의 공백기, 즉 ‘흡수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장 내 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끊임없이 그 거대한 지식의 호수에 나를 노출하다 보면, 어느새 내 발등은 그 깊은 물에 젖어들 것이고 그 적셔짐이 결국 나의 새로운 문장이 될 것이다.

누군가 굳이 왜 그런 어려운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벽돌책을 부수는 일은 책을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부수는 일이라고. 재미있는 책은 나를 위로하지만, 어려운 책은 나를 확장시킨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을 세계에 나를 억지로 노출시키는 이 과정은 내가 더 넓은 세계를 갈망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억지로 읽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시야를 갖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나는 지금 독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스케일을 넓히는 중이다. 작아진 세계 안에서 편안히 머물 것인가, 조금 버겁더라도 저 너머의 풍경을 보러 갈 것인가. 벽돌책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려 한다. 부수는 게 아니라 쌓고 있는 중이라고.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시야를 갖기 위해서라고.


혹시 두꺼운 책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 질문 하나만 던져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확장하고 싶은가.” 그 질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이미 그 담벼락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책을 부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던 작은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을 테니까.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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