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음표 May 30. 2024

살려고 기어나왔다

아직 살아있는 내가 끔찍하게 죽은 너에게

1

죽은 네가 억지로 감긴 눈을 뜨고

입을 열어 안 죽은 나한테 말했다


억울해 역겨워 비참해

[        ]


아직 살아서 버티는 나는

처음에는 죽은 네 모습이 무서워 도망가기 바빴다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못 듣고 놓쳐서 더 미안하다


투명한 고통이 방 안에 퍼졌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나가지도 못하게 망가지겠구나


난 산 채로 썩어가기 싫었다



2

20살 [실명]이 죽은 [실명]의 고통을 덮어쓰고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로 기어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기가 봐도 참 위태로웠다


[실명]은 지금도 가끔 돌아가서 무작정 드러눕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도 버틴다


자기가 갇혀서 죽어가던 곳에 어떻게 다시 가냐면서

안 죽은 [실명]이 살아서 발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실명]은

어떻게든 기어나와서 살아보겠다는 사람에게

무리하지 말고 편히 쉬라는 말이 얼마나 큰 모욕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같이 버틴다


죽기 전에 지금 살아있는 [실명]처럼 발악할 때는

잘 버티고 있으니 도와줄 필요 없겠다던 사람들이


자기가 죽어서 냄새나는 고통을 흘리고 다니니까

제발 왔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나오지 말라고 등을 떠밀더라


안 죽은 [실명]이라고 다를까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산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

축축한 두려움이 마를 날이 없다


안 죽은 [실명]이 가는 곳마다

죽은 [실명]한테서 덮어쓴 투명한 고통이 뚝뚝 떨어져서다


안 죽은 [실명]은 터져나오는 고통을 틀어막고 싶지 않다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지만

억지로 죽은 [실명]의 흔적을 지우면서까지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3

투명하게 썩어가는 고통에서는 냄새가 나

나는 너무 많이 겪어봐서 더이상 무섭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못 견디게 소름끼치는 냄새인가봐


조금이라도 새어나가면

산 사람들은 무조건 눈치채고 도망가더라


그것도 모자라 나한테

제발 우리 눈에 띄지 말라고

네가 안 돌아가고 버티면 우리가 무서워서 못 살겠다고

썩기 싫어 도망가는 내 발목을 잡아서 넘어뜨린 다음

내가 뛰쳐나온 곳으로 다시 밀어넣더라


누가 나를 이렇게 죽일 때마다

살아있던 내 일부들이

버티다 무너져서 죽은 너한테 가


말을 잃은 나들이 늘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들이 늘어가 


도망쳐 나온 곳 말고는 돌아갈 곳이 없지만

거긴 안 돼


나를 이미 여러 번 죽이고

지금도 투명하게 썩어가는 고통이

더 이상 내 앞날을 짓누르지 않기를

이전 01화 말이 되지 못하는 고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