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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3.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4 : 온정의 시야

 내가 어렸을 적 살던 구축 아파트 단지 내부의 낡은 놀이터에서는 매 주말이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장터를 열곤 했다. 마침 아이들은 격주 토요일마다 학교에 가지 않는 휴일을 가졌는데, 이 두 날이 겹치는 격주 토요일이면 꽤나 동네가 시끌벅적하게 판이 벌어지곤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장터에 내놓을만한 것을 들고 모여들어 천막을 쳤다. 뭐가 그리 바쁜건지 싶지만 어른들은 바지런히도 움직였다. 주욱 머무노라면 서로 무언가 조율하듯이 건네고 또 건네어받더라. 물리적인 거리는 점점 좁혀가고 사람들은 서로의 행위 하나하나에 초점을 두었다.

" 거 회장님, 내 지금 이거 잡고 있으니께 천막떼기 언능 좀 건네주소. 바로 박어야허니까."

큼직한 목청으로 부녀회장 아주머니가 걸쭉하게 사투리를 뽑았다. 아파트는 북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집에 가고 있었다. 사실 오늘 나는 이 시간에 집 밖에 나와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난 주 토요일에 학교를 갔기 때문에, 이번 주 토요일에는 학교를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을 내가 잘 기억했더라면 지금쯤 집에서 나른하게 늘어져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자고있었을텐데. 아쉬워할 새도 없었다. 집에서 쉬고 싶다면 어서 집에 가야만 한다.

" 거는 내가 아이라 저짝에 짐 풀고 있는 새댁한테 물어보아야 쓰겄다. 나는 저기야, 천막을 잡어주기에는 손이 모지라서. "

" 새댁, 거 여기 손 좀 빌려줄 수 있는가?"

" 어머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힘이 부족해서 그 천막을 팽팽하게 잡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 아이 거, 저렇게 허약해서는 저걸 어데다 써. 좀 이따 거 마무리하면 이리 와서 수육이나 같이 잡숫고 가라.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지... "

아주머니는 자신을 대신해 천막을 잡아줄 사람을 찾아 빠르게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놀이터 뒤로 나무에 가려진 샛길이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떠올렸다. 지금은 여름이라 나무에 이파리가 무성하다는 점이 그토록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놀이터를 둘러싼 낮은 담장 뒤편으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담장을 따라 대강 삼십미터 정도만 걸어가면, 샛길의 초입부터는 개운하게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었다. 선명한 햇살이 나의 그림자를 그토록 선명하고 길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런 선택은 미뤄두고 그저 숨이 벅벅 차오를 정도로 달려서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 아아 그래, 저어기, 저 지나가는 아한테 잡아달라고 하면 어뗘. 체격도 또래보다 꽤 커보이는데, 한번 부탁해보시오."

불행히도 나는 아주머니의 시야에 결국 들어오고 말았다. 오늘 아침의 실수로 액댐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 아가, 너 혹시 어데 가니? 네가 키가 크니 저 봉에 걸칠 천막을 좀 잡아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주변이 그토록 시끄러웠건만 왠일인지 나는 그 단순한 질문 한 마디에 여름날 바싹 말라버린 벽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나치게 수줍은 아이였다. 여전히 다른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순간 오롯이 나만이 우물쭈물대며 멈춰섰다.

" 어, 으응, 엄마 심부름 마치구 이제 집에 가요."

간신히 목에 힘을 주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을 뱉어본다.

" 으응, 그럼 어쩔 수 없제. 어여 집에 가련, 어머니 기다리신다."

나는 언제 담장 뒤를 기어서 걸었냐는듯이 땅을 박차고 곧장 집을 향해 뛰어갔다. 이미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목이 아팠지만, 이대로 계속 뛰다보면 하늘로도 걸어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작 그 짧은 대화가 끝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렇게나 개운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꼭 그 날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의 시간이 다르게 가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배웠다.

시간을 어서 빨리 흘려보내고 싶었다. 시간 앞에 망연하게 멈춰 서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을 따라 흐르고싶었다.  

나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다소 뜬금없는 결론이라는걸 알지만 그렇게 했다. 공부를 하면 생각이 빠른 속도로 전환되는 점이 좋았다. 단조로움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똑딱이는 시침 소리에 박자를 맞춰 사각이는 샤프 소리.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대개 " 너는 어른스럽구나." 라고 말하곤 했기에, 빨리 어른이 되어가는 듯한 감각이 들어 만족감이 들었다.

언젠가 꿈을 꾸었다. 나는 눈이 푹푹 나린 산 속에서 스키를 타고 내달리고 있었다. 날씨는 그토록 맑고 깨끗할 수가 없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바람이 선명하게 갈라지는듯한 촉감이 볼과 귀를 스쳤다. 살을 엘랑 말랑 날카로운 바람이 눈밭을 쓸어간다. 내가 가는 길은 점점 반질반질 매끄럽게 닦여서는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반짝였다. 어느 순간부터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속도는 야속하게도 바람을 따라잡기라도 하려는 듯이 점점 빨라진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꿈에서 깨고 말았다. 너무 욕심을 내었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깔끔하게 책장에 세워져 정리된 책들이 눈길을 끌었다. 한 치의 틈으로 어그러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자태가 꼿꼿했다.

책장 가득 나의 물건이 반듯하게 쌓여갈수록 물건 사이에는 먼지가 내려앉을 공간조차 부족해졌다. 나는 점점 완숙해가며 삶에서 놓치는 것이 줄어갔다. 어른들은 그런 내게 너는 사춘기 없이도 참 잘 자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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