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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4.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5 : 휘림의 시야

뎅, 데엥-하고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기에 보신각에는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신년맞이 카운트다운 방송 중계조차도 챙겨보는 것이 퍽 귀찮아서 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종을 친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었을 뿐이지, 정말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어쨌든 다들 울렸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하여 열네살이 되었다. 여전히 열세살같은 그런 열네살이 되었다. 텔레비전 속 화면에서 울리는 폭죽의 폭발음처럼 휴대전화에서 신년 인사 연락이 닿는 소리가 펑, 팡, 하고 울렸다. 나로서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밤같은데도 사람들은 마치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참 다정히도 서로를 축복했다.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 시간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사람...

나는 그저 멍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세상은 이토록 소란하다는 것에 대해 어쩐지 괴리감을 느꼈다.

" 엄마,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올게."

" 이 시간에 어디를 나가려고 그래, 위험하게."

" 편의점 택배 받을게 있어서. 지금 안 가져오면 반송될거야, 금방 다녀올게."

" 또 쓸데없는 거 샀구만, 얼른 다녀와."

  대화가 늘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어느샌가 거짓말이 제법 능숙해졌다. 나이를 먹은지 오분 만에 성장한 첫번째가 거짓말이라니, 거 참...

밖은 너무나 고요했다. 나는 퍽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는 지금 딱히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말로 편의점에 가려던 것은 아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집 앞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텔레비전을 보면 이런 밤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젊은이들은 으레 놀이터의 그네 따위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던가.

녹이 잔뜩 슬은 쇠사슬로 엮인 그네에 털썩 앉았다. 가죽 밴드로 연결된 앉는 부분이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듯 축축했다. 텔레비전 속 그들은 이런 궁둥이의 축축함을 참아내고 있는 거였다니, 낭만적인 화면에 나는 속고 말았다. 그렇다고 다시 일어나기에도 귀찮았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늘은 새삼스러이 맑고 지금껏 그래왔듯이 별들이 반짝였다. 저-어기 살짝 움직인 저 붉은 빛은 민항기 식별 표식일테니까, 저건 빼고.

상투적인 걱정이 고개를 든다. 올 해는 어떻게 흘러갈까. 시간이 쌓이고 기억이 쌓이다 보면 행여나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되지는 않을런지.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건가? 역시 나만 너무 걱정이 많은게 아닐까?

" ...학생."

  희미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실 너무 작은 소리라서 칼바람에 묻혀버린 나머지 그게 인기척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 학생, 이런 늦은 시간에 혼자 이렇게 인적이 없는 곳에 혼자 앉아있으면 위험해. 혹시 집 나왔니?"

낯선 목소리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걱정을 건넸다. 여기 나 말고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당연히 저건 내게 건네는 말이리라.

" 이렇게 특별한 날 집을 나갈리가요, 바람 좀 쐬러 나온 참이었어요."

시간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을 리는 없지만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촉감이 너무 선연하고, 나의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져 나의 눈 앞에 선 사람의 표정에 초점을 잡아냈다.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하나하나 강하게 느껴졌다.

20대 남짓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머리를 묶은 듯 했다. 말총같은 긴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고, 귀부터 뺨까지 얼굴이 발갰다. 나른해보이는 찢어진 눈매를 하고 있었지만 또렷하게 내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 그래도 이제는 정말 들어가야해."

" 어째선지 아직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집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에요."

" 그래도 집에서 생각해보는게 나을텐데."

  집에서는 이렇게 선명하게 지금을 느낄 수 없을 터였다. 소란 속에서는 무언가 미처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 조용함이 반드시 필요했다.

" 그렇-네요. 들어가-봐야, 겠어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음절을 늘이며 대답했다.

나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머쓱해진 나머지 미소를 짓는 것을 참으려다 입가가 추위에 이내 굳어버렸다. 이상한 표정을 숨겨보려 고개를 푹 수그렸다.

" 아, 저기, "

" 무언가 볼일이 남았니?"

나도 모르게 가려는 여자를 급하게 붙잡았다. 안면도 없거니와 달리 용건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고마워,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으렴."

여자가 다시 등을 돌려 놀이터 뒤편의 샛길로 걸어갔다. 그새 쌓인 눈이 밟히며 뽀드득, 뽀득 하는 소리를 내며 패이는 것이 보였다.

언젠가 보았던 비포장 도로 표면이 생각이 났다. 나만이 깨어있던 어느 어린 날의 새벽녘이 겹쳐보였다.

아까 그 사람은 이내 동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누나도 아침을 향해 가는걸까.

 괜한 아집으로 여기 자리를 지키고 섰다가는 내게는 영영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이내 그넷줄을 손으로 퉁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덩이는 여전히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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