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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4.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6 : 온정의 시야

치익, 탁.

연말이니까, 하고 으레 매년 그랬듯이 캔맥주를 뜯었다. 냉동실에 넣었다 꺼낸 캔맥주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하게 맺혀있다. 그 위로 하얀 맥주 거품이 넘쳐 흘러내린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세월이 빨리 가기를 바란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제 내년이면 내가 몇살이더라. 아냐, 또 알게 뭔가, 관두자. 스물이 넘어가던 그 순간부터 나이를 세는 것이 영 버겁다. 나이란건 그저 몇년도에 태어났는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나는 그래, 호랑이띠다. 황금 호랑이 해에 태어났다. 물론 12간지는 단지 근사한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서 내가 태어나던 시점에 우리나라에는 엄청 큰 경제위기가 터졌다. 금이 모자라서 금모으기 운동같은 걸 했다고 했었던가. 내 눈에 띄는 금색이란 이 맥주밖에 없는 것 같은데. 가만, 요새 금값을 꽤 쳐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에 뭐 패물이라도 좀 없으려나... 술에 취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진다.


오, 사, 삼, 이, 일... 국민 여러분, 이천이십삼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나운서가 제법 당찬 어조로 신년사를 전한다. 그는 중년의 남성인데도 어쩐지 풋풋함 마저 느껴질 정도로 밝았다. 저 밝은 표정 앞에서 오징어 다리를 질겅대며 캔맥주를 뜯는 내가 조금 머쓱해질 정도로.

계묘년이라, 올 해는 흑토끼 해구나. 어쩐지 흑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수면양말을 신은 채로 삼선 슬리퍼를 대충 구겨신고 현관을 나섰다. 아까 본 티비 화면 속 보신각은 왁자지껄하던데, 역시 동네 아파트 단지는 고요했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술 기운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편의점까지 가는 길은 대강 육백미터 남짓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 그래도 이 정도 가로등이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얼른 맥주만 더 사서 들어가자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놀이터를 끼고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웬 아이가 그림자를 길게도 드리우며 그네에 앉아있었다.

저 나이 대라면 응당 저럴 때지 싶다가도, 어른답게 집으로 갈 것을 권해야 하나 싶었다. 단지 내 시계를 올려다본다.

시계 바늘은 열두시 육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매한데. 좋아, 편의점에 다녀왔을 때도 앉아있다면 그 때는 종용해보자. 귀찮으니까 지금은 말고.  

" 봉투값까지 하셔서 만이천백원입니다. 민증 있으세요?"

수입맥주는 분명 네캔에 만원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 마저 가격이 올랐다니... 하지만 내 연식에도 민증 검사를 하잖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 봉투는 빼주셔도 됩니다. 저, 여기 민증하고, 카드..."

패딩 주머니 속에 민증이니 카드니, 꾸역꾸역 캔맨주 네개를 쑤셔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하게 늘어졌다. 옷차림이 이렇게 흉해질 줄 알았다면 역시 봉투를 받을걸 그랬나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저 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집에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나는 서두르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사락사락 날리던 진눈깨비가 잠깐 새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나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흰 눈이 푹푹 나렸다. 다정한 나타샤도, 나를 태워줄 당나귀도 없건만 이걸 급하게 뚫고 가려다가는 넘어질 것이 분명했다. 별 수 없이 나는 발끝에 힘을 주어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내딛었다. 이 정도 눈이라면 봄 방학이 끝날 때까지 녹지 않을텐데,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싶었다.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걷던 차에 저 멀리 놀이터에 정말로 아이가 보였다. 아까 편의점에 갈 때 마주쳤던 그 아이였다. 아까는 역광 방향으로 보여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가로등 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데다 하얀 눈이 반사판 역할까지 하고 있었던 탓에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열..서너살 남짓의 남자아이였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이 시간까지도 밖에 앉아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아까 말을 걸었어야 한다는 뒤늦은 후회가 치밀어올랐지만 이제와서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만히 차가운 숨을 들이켠다.

...저기,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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