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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5.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9 : 휘림의 시야

 겨울 방학 과제 안내문을 주욱 훑어보았다. 받아야 할 교과서나 교복 규정은 미리 읽었지만, 과제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봄 방학이 끝나고 나면 학교에 독서록을 완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책이라.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독서록에 쓰기 위해서 읽을만한 책은 몇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문제집과 필기로 빽빽이 들어찬 공책만이 책장을 칸칸이 채우고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칸에서 틈을 비집고 공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종잇장은 이리저리 구겨지고 글씨는 자갈이 많이 쌓인 비탈길처럼 이리저리 튀어나와 줄이 맞질 않았다. 그래도 이왕 꺼낸 김에 찬찬히 읽어내려간다. 이상하다. 글 속의 화자는 일정한데 문체가 계속 이리저리 바뀐다. 이걸 내가 대체 언제 썼던걸까? 분명히 내 글씨로 쓰여진 글일진대 그 글은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생경했다. 그 글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내가 그 글을 써놓고는 한 번도 읽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여지껏  마냥 쓸 줄만 알았지 읽을 줄은 몰랐다.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가 뛰어보겠다고 기를 쓰던 다. 여지껏 내가 몇번을 넘어졌던가. 무릎이 지면을 박으면서 땅이 패이고, 길은 점점 험해져 왔으리라. 나는 내가 놓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미처 쓰지 못한 일기장 중간의 빈 종이들, 막상 다녀보니 나와 맞지 않아서 그만두었던 학원, 시험장에 들어갈 때서야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던 손목 시계,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 그것들은 당연히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놓친 것들은 놓친 채로, 아쉬움도 뒤에 남겨두고 계속 가야만 했다. 나는 이튿날의 일기를 썼다. 새로 옮긴 학원에서 나는 잘 적응해냈다. 집에 두고 온 시계는 놓아주고 고사장 초입에 앉아있던 어느 할머니에게 새 시계를 다시 구입했다.


 서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기록은 그대로 놓아두고 새 책을 사야지. 이제서야 진정으로 발걸음을 떼는 것 같았다. 비로소 시간이 내게 꼭 맞는 속도로 편안하게 흐른다.


잘 들어가지 않는 성가신 운동화 뒷축을 대충 구겨신고서는 현관문을 나섰다. 잘 풀리지 않는 일은 잘 풀리지 않은 채로 두어도 괜찮다. 그 다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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