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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2.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3 : 휘림의 시야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즈음의 나이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내게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느껴지건만, 늘상 느긋해보이는 인상의 나를 보는 어른들은 어지간히도 조급한 모양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배우는 모든 것들은 시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역사 시간에는 지나간 시간 속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과학 시간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국어 시간에는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선생님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아 보이는 시간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너무나 길어보이는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밤 하늘에 반짝이는 빛은 수억년 전부터 달려온 빛이 드디어 우리의 시야에 닿은 거라는 걸 알고 있니?

책상 위의 물병에 맺힌 그 물방울은 수십억년을 내리 쉬지 않고 흘러온 끝에 네 앞에 있는 거란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 참 아쉬운 일이야.


그 선생님은 다소 시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교사였다면 아이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여기는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그토록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다만 그 말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도리어 노랫말같이 기분좋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렇게 짧은 대서사시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문득 무언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야, 지루한건 알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어느 순간부터 미동도 하지 않자 그만 눈을 뜬 채로 잠들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분명히 수업 시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조금은 억울한 노릇이었다.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선생님께서는 내게 수업 시간에 공상에 빠져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잦아졌다고 꾸지람하셨다.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히 귓전에 때려박힌 나머지 그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 뒷말을 놓치곤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말들은 너무 강렬한 나머지 내게도 그 잔향이 깊이 배었다. 지루할 리가 없잖아요, 내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다.

나는 답답한 기분이 가시지 않자 서로의 시간을 비교하는 버릇을 들였다. 그렇게 시간을 비교함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면안심했다. 마주하지 않고 평행하게 달리는 시간선을 바라볼 때에서야 나는 비로소 우리가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지각할 수 있었다.

달리 어려운 걸 시도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모았을 따름이다. 작은 알람 시계, 탁상용 달력, 손목 시계, 그런 것들. 시간을 눈으로 보고 만짐으로써 느끼고 비교해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공부량이 많아지자 나는 스터디플래너와 일기장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소모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언젠가 꿈을 꾸었다. 나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헉헉대며 달리고 있었다.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달리면 달릴수록 이상하게 땅이 푹푹 패여갔다. 넘어질까 싶어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달리고 달리다 문득 길이 꺾여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경추부터 엉덩이까지 저릿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뼈 마디를 따라 현실감이 깨었다. 나는 책상 위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너무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나머지 가위에 눌려서 아팠던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 앞에는 필기로 가득 메운 학습지 프린트가 제멋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나의 팔에 눌린 자국을 따라 종이가 구겨지고 흑연 자국이 번졌다. 종이 모서리의 필기 부분에 펜의 잉크가 살짝 번진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어찌나 혼곤히 잠에 들었던지 침까지 흘린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원.


 종잇더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꿈 속에서 달렸던 그 비포장 도로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기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손의 속도가 절대로 실제로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나의 그런 기분에 사춘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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