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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01.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2 : 온정의 시야

  오전 여섭시 오십분에 맞춰둔 알람 시계가 시끄럽게도 울린다. 분명히 오분 전에 칠흑속에서 잠들었던 것만 같은데, 거짓말같이 아침은 눈 한번 깜박인 사이에 찾아온다. 그 사이의 여섯시간 삼십분은 세상에서 도려내어지는게 아닐까 싶은 기분마저 든다. 이걸 사실 아침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린 여전히 이걸 아침이라고 부를게다. 내 눈에 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아니하며 지구는 돌고 해는 떴으리라.

 몽롱한 정신을 붙들고 화장실에 간다. 세수를 하면 정신이 좀 드니까. 세수부터 해야만 한다. 얼굴에 찬물을 좀 철퍽대고 나면 비로소 각성이 된다. 두근두근 맥박이 오른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문득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침상 옆에 붙어있는 환자감시장치 모니터의 심박수 그래프를 떠올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그것은 도대체가 멀쩡한 박동을 보여주는 법이 없다. 일직선 상에 희미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삑, 삑, 하고 비프음을 토하며 삼각형의 장애물을 그린다. 나에게 느껴지는 시간이라는 것은 딱 그런 인상이었다. 정직하게 일직선을 그리다가 이따금 삑, 삑... 그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선명한 외줄을 타는 것이, 삶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육성으로 뱉었던 적이 있다. 건너편에 앉은 친구는 듣는 이로서는 퍽 강박적이고 불안정하게 들리는 표현이라며 떨떠름하게 웃었더란다. 실은 나는 되려 그런 생각으로부터 안정감을 느꼈다. 내가 능동적으로 고민하는 일은 그만큼의 수고로움을 요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고로움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에 태어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미는 일 조차도 귀찮아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사가 되었다. 언뜻 나같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냉소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이 나의 적성에 잘 맞을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제법 성실했고 주어진 도덕 규범을 준수하는 데 능했다. 다른 친구들이 나를 선생님처럼 따를 정도로 말이다(그걸 학자들이 또래 교수라는 용어로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 대학교에서 수강한 교육학 개론 수업 시간에서였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선생님은 그 누가 보아도 내게 적성에 맞는 직업이었다.

그런 일련의 예상들은 첫 출근에서 보기 좋게 무너졌다. 나는 이토록 소란한 풍경을 본 일이 없었다. 그건 정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막내라 동생이라는게 없었다. 부모님은 좋은 학군을 고집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교실이란 늘 모든 아이들이 정갈하고 반듯하게 앉아있는 곳이었다. 유치원? 나는 영어 유치원을 나왔다. 영어 유치원은 애초에 법적으로 보육 시설이 아니라 학원이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 선생님, 우리는 왜 지금 자리에 앉아있어야 해요?"

" 왜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는 늘 신발을 신어야 해요?"

" 우리집 강아지는 학교에 같이 오면 안되나요?"

학부 시절 들었던 교육학 개론은 머릿속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는 사람이 이렇게 간단하고 당연해 보이는 일부터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일순간에 다시 성장을 시작해야하는 어린 아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 내 눈 앞에 보이는 너희보다 내가 무엇이 잘났으랴.

" 선생님, 선생님은 이름이 뭐에요?"

한 아이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내 이름을 물었다. 이 교실에서는 좋든 싫든 나도 아이들도 동등한 입장이 되고,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시선을 살짝 올리자, 교탁을 향해 정갈하게 이어지는 책상의 분단줄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 앞에 다시 한번 환자감시장치 모니터가 겹쳐보인다. 조금 현기증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입술을 뗐다.

" 안녕하세요, 우리 친구들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볼까요? 선생님 이름은..."

숨을 들이켜며 나의 이름을 칠판에 탁탁 써내려간다. 등을 빙글 돌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눈을 맞춘다.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꼭 밤하늘의 별들처럼 빛난다. 이런 풍경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다면 책 속의 아침 햇살같은 건 없어도 좋다.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발짝 내딛는다. 나는 오늘도 시간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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