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20 : 휘림의 시야
최근 들어 학생들이 대출한 책에 무언가를 꽂아놓은 채 반납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알 수 없는 말로 쓰인 편지, 어떻게 말린 것인지 모를 압화, 즉석 사진기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뭐 그런 것들. 그저 책장 사이에 꽂아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클립으로 고정해두어서 책이 훼손되는 경우도 있어 영 마뜩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 최근에 그런 식으로 친구를 만나는게 유행이래."
친구가 감자칩을 오독오독 씹으며 말했다. 분명 우리학교는 매점이 없는데, 이 자식은 어떻게 매번 간식을 먹고 있는걸까. 설마 집에서 가져오나.
" 아 제발, 내가 진짜 그 놈의 감자칩 좀 도서실에서 먹지 말랬지. 종이에 기름 밴다고."
" 까다롭게 구는구만. 이제 거의 다 먹었으니 가방에 집어넣을게."
" 그건 그렇고, 멀쩡한 휴대전화를 두고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식으로 연락을 한다고? 왜?"
" 요즘 인터넷에서는 옛날 세대 문화가 유행이래."
" 인터넷에서 옛날 문화가 유행이라니, 그렇게 모순적인 말이 세상에 어디있을까."
" 아무튼 제발 말 좀 끊지 말고 끝까지 좀 들어. 그 중에서도 비밀 암호로 고백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썩 유명해지지 않아서 남들에게 소문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몇몇 애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어. 도서실의 책들은 아마 그 결과물일거라고."
활동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친구라서인지 아는 것이 참 많았다. 서로 쉬지 않고 구박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는 나에게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는 통로는 정말이지 너밖에 없다.
" 이건 도깨비말, 이건 초성체, 이건 90년대에 쓰였다던 삐삐 수신호..."
친구는 내가 따로 빼놓은 편지와 사진 속 내용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제서야 그 글이 누가 어떤 내용을 쓴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도서관에 왔으면 책만 읽고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난감해졌네."
나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대답했다.
" 반대로 말하면 도서부원인 너는 이제 누가 누굴 좋아하는지 전부 알 수 있다는 거 아니야? 나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친구는 아무래도 호사가 기질도 조금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앞으로는 이 녀석에게 비밀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신중해져야겠지.
" 글쎄. 적어도 나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같은 거 전혀 궁금하지 않아서, 나한테는 의미 없는 것 같아."
"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 이야기 궁금하지 않아?"
" 음, 진짜 친구들보다는 책에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
" 에이, 나도 네 친구 아냐? 조금 서운한데."
친구가 빙글거리며 농을 던졌다.
"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걸 알잖아."
나는 머쓱함을 숨기려는 듯이 어색하게 크게 웃으며 받아쳤다.
" 아무튼, 책 밖의 세상도 한번쯤은 둘러보라고. 네가 읽는 책들 대부분 옛날 소설이잖아.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국 오늘인데, 가끔은 네가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야. 그러니까...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 탁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즐거움이라는 것도 있잖아. "
이 친구는 절대로 말재주가 없는게 아니다. 적어도 나는 방금 그가 한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언행이 조금 가벼운 구석도 있지만... 이렇게 순간순간 꽤나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면모가 있었다.
" 그건 새겨들어둘게."
" 네가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더할 나위없이 좋지. 진짜 늦었다, 이만 가자. 애초에 나는 너랑 같이 하교하려고 여기서 기다린 거란 말야."
" 이제 대출도서 출납 장부 정리가 얼추 끝난 것 같아. 네가 먼저 중앙 현관 으로 나가서 기다려줄래? 가방도 챙기고 자물쇠를 잠근 후에 담당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귀가해야하거든."
"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나와야 해?"
오늘도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하늘을 보면서 집에 간다. 다만 오늘은 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제법 길었다. 꽤나 가벼운 대화를 한 것 같은데, 그런 연유로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도 꽤나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고 싶었다.